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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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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ug 11. 2024

2024년의 텃밭일기 : 0811

  덥다.  단순한 이 한 마디가 가장 강렬한 형태로 일상을 장악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진료실 에어컨 아래 앉아있는 나는, 잠시 밖을 나가보면 더움의 격렬함을 느낀다.  하지만 진료실 안에서도, 격렬함은 어렵지않게 느껴진다.  맹렬한 폭염에도 바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탈진하여 병원을 찾는다.  까맣게 탄 얼굴로, 지치고 기운없는 표정으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기운을 북돋운다는 성분과 고용량 비타민을 섞은 비싼 비급여 수액보다도, 당장의 탈진과 일사병에서 회복시킬 생리식염수를 넉넉하게 투여해야 하는 급여처방이 절실하고 잦은 시기이다.  인간은 불행하다.  한겨울 맹추위와 천재지변과 폭우 폭설, 그리고 지금같은 폭염에도 일과 노동이라는 명목으로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일하다 지쳐 쓰러져도, 노동의 가치엔 변함이 없고 보상은 스스로의 몫이다.  인간과 자연은 이럴때 이질적이다.  자연을 따르지 못하는 인간의 삶, 무더위와 비를 피해 생생한 나뭇잎 뒤로 매달려 몸을 쉬는 제비나비나 메뚜기보다 못하다.  


  맹렬함을 그대로 받아내는 텃밭의 풍경은 쳐짐이다.  호박잎은 잎 가장자리가 축 늘어지고, 고추와 가지 이파리들도 힘없이 늘어져 있다.  숨어서 덩치를 키운 애호박들은 어느새 누렇게 색이 변하고 있고, 가지들은 만져보면 따뜻하고 물렁하다.  고추는 하나 둘 병충해가 생기기 시작하고, 미지근하고 무르다.  이 폭염에 어디서 알을 깐 것인지 톱날노린재 유충들이 고추 줄기 사이사이를 다니고 있다.  오이덩굴은 이미 말라 죽었고, 토마토는 줄기들이 어수선하게 산발하면서 사이사이로 붉은 알맹이들을 맺어내고 있다.  호박과 고구마와 수박덩굴이 엉켜 뒤덮인 자리 한 켠에서는 수박 두 세개가 사람 얼굴만하게 커져 검은 줄무늬를 점점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수박 세 개 정도면 우리 텃밭에서는 잘 맺고 키운 정도다.  하지만, 올해의 특이점은 참외다.  참외덩굴을 의도와는 달리 많이 심긴 했지만, 땅을 뒤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더니 여기저기 보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외들이 크고 노랗게 익어가는 것이었다. 

  맹렬한 더위, 폭염에 비례해서 텃밭은 여름의 정점을 지나고 있다.  인간이 먹을 것들이 넘치도록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작물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가열찬 몸부림이라면, 폭염에 탈진하도록 노동하는 인간과 다름없는 신세일 것이다.  아니면, 폭염에 활기를 얻은 것들이 신나게 제 생존을 도모하는 과정이라면, 인간은 그 신남을 이용하여 제철을 즐기는 중이다.  뭐가 됐든, 인간은 지금 텃밭에서 제철을 즐기는 중이다.  즐겨야만 하는 의무감이던지, 아니면 잔치상을 차리는 기분으로 스스로 즐긴다.  먹을 것들이 넘치도록 열리는 현상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폭염에도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장갑과 장화를 착용하고 가위를 들고 텃밭을 돌아다니지 않으면, 즐김은 불가능하다.  폭염속 잠깐의 노동으로, 식탁은 매번 풍성함으로 채워진다. 


  이제 막 거둔 고추의 생생함과 아삭함, 물기 가득한 오이의 생기, 수분 가득한 애호박으로 방금 부쳐낸 전의 달달함과 풍성함 미감은, 여름이 짙어가는 때의 행복이다.  이를 경험하는 것은 마치 회심과 같다.  깨달음 끝에 신앙의 늪으로 스스로 빠져들며 귀의하는 삶.  텃밭이 내게는 그렇다.  이 경험이 없이는 텃밭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삶을 다독이는 작은 고행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였을 지 모른다.  작은 고행의 중간중간 만나는 살아있는, 생기 가득한 미감과 식감은,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엔 좀 어려운, 삶이나 자연의 근원이나 본래의 모습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노동함, 자연함, 가치의 본질, 시간과 순환..  너무 거창한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출근 전 아침의 식단에 나온 오이와 고추를 하나씩 베어물면서, 자연과 인간의 이질감을 가늘게 깨닫는다면 설명이 될 지 모르겠다.  

  8월의 중순에 접어든 이 시기의 생생함은 달달함과 함께 참외와 수박에서 느끼는 중이다.  예년과는 다른 현상이다.  수박은 그리 크게 맺히지 않았고, 참외도 모종 몇 개를 심어도 두어 개 익은 것들을 맛보고 나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멀칭과 더욱 더워진 여름날씨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노랗게 익은 참외를 깎으니 과육과 씨부분이 너무 달게 잘 익었다.  약간의 퍼석함을 간직한 과육의 달달함에 만족감이 차오른다.  잘 익었을까 싶은 마음으로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수박에 칼을 대자마자 쩍 하고 갈라지는 모습에, 쾌재를 불렀다.  수박은 속을 거의 다 채울 정도로 빨갛게 잘 익어 있었다.  가지가 아쉬웠다.  예년보다 늦게 가지가 맺히더니 크기도 작고 볼품이 없어졌다.  고급가지라는 품종을 심었는데도 말이다. 


  폭염의 정점에 텃밭의 정점.  만찬을 차리기로 했다.  먹기 좋을 만큼 자란 고추들과 가지들을 모두 거두었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도 모두 거뒀다.  덤불을 뒤져 숨은 호박들을 모두 거두고, 노랗게 익은 참외도 모두 거두었다.  먹기로 작정한 수박 한 덩이를 거뒀고, 바질과 민트와 로즈마리, 세이지를 적당하게 잘라 가져왔다.  중국식 가지튀김을 하고, 통가지 몇개는 쇠고기와 토마토 소스에 그라탕을 했다.  수박은 반은 그대로 먹고, 반은 레몬과 민트와 치즈를 넣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고추와 토마토는 그대로 내어 날것으로 먹었다.  참외와 수박 반은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둔 뒤, 잘라서 후식으로 내었다.  차고 넘치는 것들은 친구들과 나누었다.  그러고도 남은 것들은 한동안 식탁에 다양한 모습으로 오를 것이다.  

  만찬을 즐기고 나니, 텃밭의 여름 그러니까 정점을 지나 내리막의 시작에 들어선 기분이다.  텃밭도 빗방울 하나 없이 뜨거운 여름에 점점 말라갈 것이다.  여전히 살아내며 맺어야 할 것들을 맺을 녀석들은 가을을 맞이할 것이다.  제 기운을 다한 녀석들과, 인간의 판단과 필요에 따라 거둬내야 할 것들은 이제 곧 정리를 해야 한다.  인간의 필요는 가을 텃밭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너무 더우니 가을 텃밭은 시작을 조금 늦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시기라는 것은 좀처럼 기다려주지도, 사람의 판단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여전히 덥고 열대야의 나날이지만, 입추가 지난 후 아침저녁으로는 그래도 좀 더위가 꺾인 느낌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이상기후와 온난화로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다.  올해의 맹렬한 더위는 이 때문이다.  에어컨을 켜지 않을 수 없는 나날이지만, 에어컨을 가동함으로 실외 온도가 더욱 상승한다는 악순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들이 필요한 여름이다.  이 장대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이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당장을 살아야내야 하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들의 일상일 뿐이다.  견뎌내는 것들과, 견디지 못해 문명의 이기를 활용해야 하는 존재들과, 기어이 적응하여 그 모습을 제 멋대로 발산해내는 녀석들이 뒤섞여 이 여름은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내가 보여주는 이 여름의 모습은 그 결과물이다.  복잡다단함을 넘어 우리는 맹렬함의 한 지점을 통과하는 중이다.  모두에게 격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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