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금요일이 되면 휘트니 미술관이 생각난다. 일주일간의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버려야 살아남을 것 같은 직장인들의 금요일이 아니어도, 금요일이 되면 마땅히 '불금'이 돼야 할 것만 같다. 금요일에 뉴욕 휘트니 미술관이 생각나는 이유는 미술관이 준 '불타는 금요일 밤' 같은 첫인상 때문이다.
ㅣ미술관 분위기가...ㅣ
뉴욕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은 좁고 길쭉한 지형의 맨해튼을 남북으로 반을 나누고 아래쪽을 다시 반으로 나눈 지점의 허드슨 강변 쪽에 가깝다. 맨해튼은 보통 남북으로 몇 번가 (Avenue)와 동서로 몇 번째 거리(Street)로 표시하는데. 휘트니 미술관은 갠스부트 거리에 있다. ( Gansevoort Street. 육류 상업지였다는 흔적으로 예전 푸줏간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뉴욕 미술관의 입장료는 보통 30달러 정도로 한국돈으로 4만 5천 원 정도인데, 미술관마다 무료 입장하는 날을 두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원하는 만큼 내세요.) 휘트니 미술관은 금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무료입장이어서, 여행자인 나로서는 방문하는 시간이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시간대였다.
미술관 입구는 무료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차림새를 보니 대체적으로 젊고 대체적으로 커플이 많았다. 맨해튼의 여느 미술관처럼 입구에서 가방 검사를 하는데 사람이 많다 보니 한 사람씩 잠시 멈춰서 가방을 열어 보여주고 할 틈이 없었다. 내가 멈춰서 가방을 열려고 하자 덩치 큰 경비원이 웃으면서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라는 듯이 대충 지나가라고 손짓한다. 드라이브 스루 같은 입장. 입장을 기다리는 공간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모마(MOMA)와는 달리 우리 동네 구청 로비 정도랄까, 상대적으로 공간이 협소했다. 서로 어깨가 닿을 듯이 가득 찬 대기 인파 위로, 천장의 붉은 조명이FREE FRIDAY NIGHTS라고 새겨진 글자를색색의 조명으로 쏘고 있었다. 7시 정각을 휴대폰으로 카운트 다운하는 무음의 입모양들이 느껴졌다. 미술관의 첫인상이 금요일밤의 춤추는 나이트 같은 느낌이어서 처음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딱 이런 분위기였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보통 엘리베이터 두세 개를 붙여놓은 듯한 크기였다. 그 거대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금요일밤 이 순간을 기다린 사람들에게서 '불금'의 흥분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호퍼의 그림이 있는 7층의 문이 열리자 그런 기분은 조용히 흩어졌다. 휘트니 미술관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려고 갔다. 작년에 서울에서 호퍼의 <길 위에서> 전시가 있었다. 호퍼의 습작 시절부터 거의 일생을 훑어준 방대한 규모의 전시였으나,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뉴욕에 간 김에호퍼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휘트니 미술관을 간 것이다.
ㅣ 이미 서울에서 본 그림이라니 ㅣ
그 호퍼의 서울 전시가 아쉬워서 들린 곳인데 아뿔싸. 휘트니에 있는 호퍼의 그림은 서울 전시에서 본 것들이었다. 서울에 나들이 왔던 그림은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여한 것이었나 보다. 그런 상세한 내용까지 확인하지는 않는 나는 이 '불금의 나이트 같은' 묘한 분위기의 미술관에서 나처럼 호퍼의 그림을 찾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이미 본 그림이네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약간 김이 빠진 나는 바람이나 쐴 겸 전시장을 벗어났다.
ㅣ휘트니의 테라스ㅣ
많은 사람들이 어디선가 뉴욕 맨해튼 야경을 한 번쯤은 보지 않았을까. 도시의 야경이라는 이미지들은 거의 다 뉴욕 맨해튼 야경이었을 것이다. 맨해튼의 고층 빌딩들(Skyscraper, 마천루)은 밤 풍경을 위해 지어졌나 싶을 정도로 도시 야경의 전형처럼 소비된 것 같다. 나도 우연히 맨해튼 거리를 돌아다니다 마천루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앞을 지나갔는데, (당일 표를 살 수 있었지만) 굳이 올라가지 않았다. 사람보다 고층 건물이 주인인 듯한 맨해튼의 좁은 거리를 걷다 보면, 어떤 측면에서는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휘트니 미술관의 옥상에서 야경을 보게 되었다. 휘트니의 옥상(테라스)에서 보는 뉴욕 야경은 현실감이 있었다. 멀리 왼쪽에 크라이슬러 빌딩부터 오른쪽으로 허드슨 강변 모습까지 보인다. 서울에 동작역에 내려서 반포 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엇비슷한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휘트니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어느 도시에나 있을 법한 높이의 건물들 사이에 차가 지나다니는 평범한 밤 풍경처럼 느껴진다.
이래서 금요일 밤에는 휘트니 미술관에 가야 하는구나. 이 부드러운 야경 때문에 말이다. 층마다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내가 미술관의 입구에서 느낀 분위기는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금요일 밤에 연인과 함께 이 편안한 풍경을 보기 위한 기대와 흥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