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23년 11월 말에 서점가를 강타한 책은, <나는 메트로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일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All the Beauty in the world>로 직역하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예술) 정도라고 할까. 영어 뷰티(beauty)가 한국에서는 미용이나 패션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경향을 감안하면 번역본의 제목이 훌륭하다. 아무튼, 근래 이 책만큼 구절구절 공감하면서 읽은 책도 드물다. 메트 박물관을 방금 보고 와서 읽은 탓이기도 하고, 특별히 <7장>을 읽으면서 나는 예전에 같은 동네 살았던 사람을 만난 듯하였다. 책의 저자, 패트릭 브릴리가 아내와 만났던 곳이자, 내가 며칠에 한 번씩 산책 갔던 길을 7장에서 소개하고 있다.
내가 보름동안 지낸 맨해튼 북쪽 동네, '뉴욕에서 제일 긴 것으로 악명이 높은' A 트레인의 마지막 전전역 근처. 숙소에서 나와 왼쪽으로 허드슨 강변 산책길을 따라 10분 정도 걷다 보면 '포트 트라이언 공원'이 나온다. 남북 전쟁 당시 요새다. 위쪽으로 점점 높아지는 테라스는 돌로 쌓아 올린 요새의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지형은 맨해튼 땅을 다질 때 여기까지는 여력이 닿지 않은 걸까 싶기도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옛 모습 그대로 둔 이유가 있었다. 길고 높게 쌓아 올린 석축에는 발코니처럼 튀어나온 곳이 군데군데 있다. 요새의 발코니에서 경치를 둘러보면겨울나무 가지 사이로 중세 수도원이라고 생각할 만한 석조 건물이 보인다. 바로 뉴욕 메트로폴리스박물관(The met)의 분관, 클로이스터스(The Met Cloisters)다.
중세 유럽 어디에 있었을 법한, 얼핏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올 법한 수도원이 연상되는 외관이다. 공식적으로 1602년 메이플라워호로 시작되는 미국땅에서 '육중한 무게감의 중세 석조 블록'을 만난 것이다. 뜻밖의 마주침에 다가가는 그 순간부터 감동이 밀려왔다. 숲이 울창한 계절에 아무것도 모른 채 산책하다가 클로이스터스를 마주한다면 다른 시대로 들어가는 판타지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12세기나 13세기에 수도사들이 예배하던 수도원인줄 알았다. 중세 예술품 전시관으로 따로 지어진 공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숭고함이 배어있다.
푸엔테두에나 예배당 (Fuentduena Chapel)
한국에서 예수상을 보고 숭고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깊고 둥근 천장 아래 십자가에 매달려 공중에 떠 있는 예수상을 마주한다. '애수'가 느껴진다는 패트릭 브릴리의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걷잡을 수 없는 복합된 슬픔이 밀려온다. 슬픈 감정에도 전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 실제 12세기 스페인 푸엔테두에나의 예배당을 해체하여 가져온 것이다. 예수상의 위로 역시 스페인 카탈루니아 프레스코화가 천정을 장식하고 있다. 돈이 많다는 것은 이럴 때는 매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록펠러 가문이 투자한 덕분에 유럽의 수도원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클로이스터의 주변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 같은 울창한 숲이 그대로 있는 이유도 그랬다. 중세 수도원과 잘 어울리는 중세의 숲이다.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스페인 남부 '알 함브라'의 '사자의 방'을 이루는 회랑이 연상된다. 그때 이후로 이런 회랑은 처음 본 것 같다. 이런 회랑들이 사각형을 이루어 가운데 공간을 만들어 낸 구조이며, 그 가운데는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꽃이 피는 시절에는 카페를 열어둔다도 한다. 가만히 앉아서 회랑을 바라보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니 생각을 쉬게 된다고 해야 할까.
전체적으로 분홍빛이 나는 대리석이다. 이런 미감을 주는 곳이 맨해튼 여행 지도에서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것은 잘못돼도 많이 잘못되었다. 클로이스터는 중세 예술품을 따로 모아놓은 곳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외관의 아름다움을 비교하자면 5번가에 있는 메트 본관과 비교하기 꺼려질 정도다. 완전히 다른 곳이다. 전체를 보아야 부분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법인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분관이라는 말 때문에,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거나 소규모 정도로 인식하기 때문일까. 평소 뉴욕 방향으로는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멀더가 자신의 동네에 아름다운 미술관이 있다고 자랑을 열심히 하더니, 바로 클로이스터스 미술관을 두고 한 말이었다. 서울에서 뉴욕 가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도 될 것 같다. 맨해튼 가서 <클로이스터스> 미술관을 안 보고 온다는 것은 말이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클로이스터스 입구의 팻말. '클로이스터스'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지은이가 보르헤스다. 처음에는 여기 왜 보르헤스의 시를 두었을까 싶었는데,보르헤스가 뉴욕을 매우 좋아했다더니 여기도 다녀갔구나. 평소 보르헤스의 문학적 재능을 10분의 1이라도 따라가고 싶은 나다. 다시 한번 놀라웠다. 뉴욕에 와서 보르헤스가 지나간 길에 내가 왔다니! '클로이스터스'를 다르게 설명할 필요 없이 보르헤스의 시_클로이스터스를 읽어보면 될 것 같다. " 클로이스터의 시간은 질서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