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울 사는 로젠 Jun 01. 2024

영화 <스모크>와 폴 오스터

연기의 무게, 삶의 무게 

   " 피우지 않는 담배를 저울에 올려서 무게를 재. 그다음 담배에 불을 붙여 피우면서 재를 조심스럽게 저울 위에 떨어서 모아. 그 모은 재와 다 피우고 남은 꽁초를 저울 위에 같이 놓고 무게를 달아. 그 무게를 피우지 않는 담배 무게에서 빼는 거야. 그 차이가 연기의 무겠지" _스모크(Smoke)』  


영화 스모크(Smoke)


   '맨해튼의 스카이 라인을 등지고 지하철 열차가 브루클린을 향해 고가 철도 위를 달린다.'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스모크』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기의 담배 가게에 앉아있는 손님들에게 소설가 폴 벤자민담배 연기의 무게를 재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가인 폴은 그로부터 3년 전에 발생한 은행 강도 사건 때 임신한 아내를 잃었고, 아직도 반쯤은 넋이 나가있는 상태다. 틈틈이 책을 읽는 담배 가게 주인 오기는 아내를 잃은 후 한 글자도 못쓰고 있는 그런 그가 매우 안타깝다. 

   며칠 후 오기의 가게에 다시 담배를 사러 온 소설가 폴은 계산대에 놓인 고가의 카메라를 발견한다. 카메라는 오기의 것이었다. 낡고 좁은 동네 담배가게 주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고 생각한 폴에게, 오기는 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오기는 13년 동안 매일 아침 8시에 매일 같은 장소에서 5분간 사진을 찍었다. 한 페이지에 6장씩 붙여둔 흑백 사진은 무려 4천 장에 이르렀는데, 폴이 보기에는 그 사진이 그 사진 같다. 날짜는 다르지만 페이지를 넘겨봐도 같은 사진이다. 매일 같은 곳을 찍어서 (굳이 돈 들여 인화해서) 정성스럽게 한 장씩 붙여 놓은 오기를 의아한 듯 신기한 듯 바라보던 폴에게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죽은 아내가 오기의 카메라 바로 앞을 지나고 있다. 폴은 오열한다. 그저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 공기처럼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이 오기의 카메라에 잡혀 하나의 형체를 가지고 오롯이 거기 살아있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담배 가게 점원이었던 십수 년 전 오기는, 가게 진열대에서 잡지를 훔쳐 달아나는 10대 소년을 쫓아 나갔다. 도망치던 소년은 지갑을 떨어트리고 사라진다. 소년의 낡은 지갑 안에는 주소가 적힌 종이와 낡은 사진 석장만이 있었다. 




    사진을 본 오기는 지갑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고, 시간이 얼마쯤 흐른 후에 소년의 집을 찾아간다. 오기가 찾아간 곳에 문을 열어 준 이는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오기가 크리스마스에 집에 온 당신의 손자라고 생각하고 반갑게 맞는다. 손자를 기다리며 혼자 계신 할머니를 위해 오기는 급히 음식을 준비해 크리스마스 식탁을 차린다. 소년의 집을 둘러보던 오기는 집 한편에 쌓인 수십대의 카메라를 발견한다. 오기는 잠든 할머니 앞에 소년의 지갑을 두고 카메라 한 대를 들고 나온다. 그러나 오기는 그 카메라를 돌려주려고 다시 그 집을 찾아갔지만 할머니는 이미 안 계셨다. 그렇게 카메라를 가지게 된 오기는 매일매일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모습을 담았다.  



폴 벤자민 오스터 (Paul Auster, 1947.2.3~2024.4.30)


    이 실화인 듯 실화가 아닌듯한 오기의 이야기는 작가 폴 오스터가 1991년 <뉴요커>에 기고한 이야기였다. 신문에서 우연히 오기 렌의 이야기를 읽은 영화감독 웨인 왕(Wayne Wang)은 뉴욕 브루클린으로 폴 오스터를 찾아간다. 그로부터 4년 후에 웨인왕 감독, 폴 오스터가 시나리오를 쓴 시대의 명작, 영화스모크(Smoke)가 세상에 나온다. 나는 폴 오스터라는 작가를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94년 영화, 2000년대 초에 비디오로 본 영화였지만 영화를 보자마자 그 원작 소설을 찾아 앉은자리에서 읽었다. 실제로 작가 폴 오스터가 동네 담배가게 아저씨에게 들은 듯한 그 짧은 이야기를 영화의 대본으로 확장하며, 담배 연기의 무게처럼 각자의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폴 오스터의 글 솜씨에 나는 감탄했다. 

    2022년, 폴 오스터의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그의 아들 다니엘 오스터는 영화  스모크에서 성인잡지를 훔쳐가는 소년역으로 출현하기도 했다. 이 사고 얼마 전에 다니엘 오스터의 딸이자 폴 오스터의 어린 손녀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다니엘 오스터가 어린 딸의 죽음에 연관되었다는 의혹이 일던 시점이었다. 올봄 4월 30일. 폴 오스터의 부고 기사를 읽었다. 연이어 불행한 일을 겪은 폴 오스터가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견디고 있었을 삶의 무게를 생각해 본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듯이 폴 오스터의 마지막 2년 동안 그가 피운 담배 연기의 무게를 생각해 본다. 




   내가 오십에 이르러 마침내 뉴욕을 가게 되었을 때 나는 폴 오스터의 책 한 권을 가지고 갔다. 스모크의 원작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이 이야기를 안 지 25년은 족히 넘었다. 영화에 나오는 담배가게가 있었던 브루클린. 영화 <스모크>의 중심 무대, 작가인 폴 오스터, 주연배우 하비 케이틀, 2부 출연자 루 리드 등 많은 관련자들이 브루클린 줄신이었다. 폴 오스터가 병상에 있다는 소식은 모른 채, 브루클린 거리를 걷다가 혹시 벤치에라도 앉아있을 그를 발견한다면 사인을 받고자 희망했다. 영화 속에서 오기가 18년 만에 나타난 애인에게 자신의 전재산을 건네주는 강변 길을 걸어, 폴 오스터와 웨인 왕이 만났다는 파크 슬로프 거리를 괜스레 돌아 나왔다. 담배 가게도 영화배우들도 비슷한 인물도 그 누구도 만나지는 못했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의 아쉬움을 채워 주려는 듯한 일은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아파트 지지하에 쓰지 않는 물건 공유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폴 오스터의 작품 한 권을 발견했다. 우연의 음악 (Music of Chance. ) 돌아오는 가방 안에 넣어 와서 내 서재에 한국어 책과 나란히 두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