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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Apr 07. 2022

지노 배낭여행기 - 49일의 세계일주 40

넴룻산 유적(3)

이번 편은 이슬람 문명과 실크로드 연구의 대가인 정수일 교수가 쓴 글을  받침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옮긴다.

나도 정교수의 글을 읽고 나서 넴룻산 유적에 대해서 알았다.(사진은 백퍼 내꺼)  



2004년 8월17일, 일행은 터키인들이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로 치는 넴루트산을 찾았다. 시 중심을 지나는데, 성보 위에 수박 한 통을 얹은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띈다. 알고 보니 고성과 수박은 이곳 상징물이라 한다. 서늘한 아침 기운을 가르며 서쪽 126㎞ 지점에 이르니 유프라테스강 상류 도선장이 나타났다. 강물은 맑고 깨끗한 청정수다. 관광객과 주민 20여명, 짐트럭을 태운 나룻배는 15분간 거울 같은 수면을 미끄러져 갔다. 이름 모를 물새들이 뱃전을 스친다. 하선 뒤 20분쯤 달려 넴루트산으로 꺾어 들어가는 어귀의 나린제 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아스라히 깊은 계곡을 굽이굽이 빠져나간다. 이윽고 가파른 산등성이에 있는 카라두트* 마을을 왼편에 끼고 한참 오르니 산장 같은 카라반 사라이 호텔이 나타났다. 잠시 쉬었다가 30분 더 달려 넴루트산 매표소에 이르렀다. 해발 2000m 가까운 고산지대라 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움직인다. 매표소 얼마 전부터는 너비 10㎝ 가량의 검은 용암석으로 포장한 폭 6~7m의 좁은 오르막길이다.


  (주) 카라두트 마을이 넴룻산 올라 가기전 마지막 마을인데 내가 이 마을에 있는 호텔에서 이틀 묵었다.

     정수일 교수 일행이 이 마을을 지나 넴룻산에 올랐는데 이 길 말고는 다른 길로는 오를 수 없다.




매표소에서 30여분간 오솔길을 따라 해발 2150m의 넴루트 산정에 등반했다.

나무 없는 민둥산이다.






넴룻산 정상이 보이고 오른쪽 밑에 있는 건물이 관리소 사무소.   


사방으로 뻗은 산들과 구릉들을 발밑에 거느린 주봉이다. 여기에 기원전 1세기 콤마게네 왕국(기원전 163~기원후 72)의 안티오코스 1세(기원전 69~31)가 자신을 위해 지은 이른바 ‘히에로테시온’이 있다. 그리스어로 ‘히에로스’는 ‘성스러운’, ‘테시스’는 ‘장소’란 뜻이다. 여기서 ‘장소’란 ‘영원히 휴식하는 곳’, 즉 ‘안식처’를

말한다. 따라서 ‘히에로테시온’은 ‘성스러운 안식처’란 의미의 분묘로 해석할 수 있다. 산상 왕국이던 이곳은 계곡에서 일년 내내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 덕분에 농경이 발달했다. 기원전 1세기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콤마게네의 초기 도읍 사모사타에 관해 ‘좁은 천연요새지만, 놀라울 정도로 기름진 땅’이라고 묘사했다.

안티오코스 1세의 ‘성스러운 안식처’는 그가 묻힌 고분과 3개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넴루트산 높이는 2100m였으나, 꼭대기에 지은 70m 높이의 분묘가 50m로 낮아져 지금은 통상 2150m를 헤아린다. 작은 자갈로 지은 고분 지름은 150m로 들어간 자갈의 부피만 약 29만㎥, 무게는 60만톤에 달한다.



동서쪽 테라스는 구조가 대체로 일치하는데, 석회암 석상들과 배후의 사암 구조물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석상들은 안티오코스 1세와 4명의 신상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수호동물인 수리와  




사자,




안티오코스 1세와 수호신들의 악수 장면을 새긴 부조물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동쪽 테라스 전경




 

5대 석상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안티오코스 1세→




여신 콤마게네→




제우스 오로마스데스→




아폴론 미트라스→




헤라클레스 아르타게네스 아레스의 순이다.


석상들은 당시 여러 문명의 융합상을 오롯이 보여준다. 콤마게네의 의인상인 여신 콤마게네는 도시나 특정 지역을 여신상으로 인격화하는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한가운데 신상 제우스 오로마스데스는 그리스 신화의 천지 주재자 제우스와 조로아스터교의 천지 창조주 오로마스데스(아후라 마즈다의 그리스어 발음)를 혼합한 신이다. 이 혼합 신상은 무게 5~0.9톤짜리 돌 31개로 만든 105톤짜리 신상으로 가장 크다. 그 오른쪽 아폴론 미트라스 신상에서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이며 미트라스는 조로아스터교의 빛의 정령이니, 역시 융합신이다. 마지막 신상은 그리스 신화에서 불멸의 강자인 헤라클레스와 전쟁신 아레스를 페르시아 군신(軍神)인 아르타게네스와 한데 묶은 것이다. 하지만 천지를 쥐락펴락한다는 신들마저도 지진 위력 앞에 머리가 잘려나가는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일부 석상이나 부조물에 새겨진 그리스어 명문들은 이 고분과 콤마게네 왕국 연구에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다. 비문을 보면 매달 16일 왕의 탄생일과 10일 즉위일에 즈음해 경축행사가 치러졌음을 보여준다. 동서쪽 테라스와 달리  




북쪽 테라스에는 석상, 비문 등은 없고, 80m짜리 벽과 몇몇 석판 잔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마 제사 때 집합 장소이거나, 후계자들을 위해 남긴 예비 테라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쪽 테라스 앞에는 사방 13m 의 제단도 있다. 아직까지 고분 입구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고고학자 고에르가 고분 안 묘실을 찾으려고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켰지만 허사였다. 첨단의 지구물리학적 방법으로도 조사한 바 있으나, 결과는 오리무중이다.


넴루트산 유적 발굴은 독일이 시작했다. 일찍이 1835년 독일의 헬무트 모르토케 대위(후에 육군원수가 됨)는 군사 작전에 필요한 이 지대 도로 지도를 작성하면서 초점을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넴루트산에 맞췄다. 그러나 발표한 보고서에는 유물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 뒤 오스만 제국에 고용된 독일인 기사 카를 제스터는 동아나톨리아로부터 중앙아나톨리아를 지나 지중해 항구까지 수송로를 탐색하다 콤마게네에서 아시리아 유물을 발견했다고 1881년 프로이센 제국 과학아카데미에 편지로 보고했다. 보고를 접한 고고학자 오토 프슈타인은 곧장 현지에 달려가 제스터와 조사에 착수했다. 이듬해 오스만제국 박물관(현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의 전신) 관장 오스만 함디 베이가 합류한 독일-터키 합동조사단은 넴루트산을 비롯한 부근 유적 조사를 1938년까지 벌여 개략적 면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콤마게네 왕국은 셀레우코스 왕국의 일부로 출범해 로마에 병합될 때까지 헬레니즘, 로마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넴루트산 유적 말고도



카라큐슈 고분, 세레우키아 암굴묘 등 다수의 유적유물들을 남겼다. 아쉽게도 이런 유적들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하산했다.*

(주) 정교수가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하산한 다른 유적들을 내가 다 보고 왔다는 것이 조금 뿌듯하다.


안티오코스 1세는 죽으면 영혼이 승천하는 것으로 믿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넴루트산 꼭대기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아마 그는 자신이야말로 하늘과 가장 가까이 있을, 그래서 가장 위대한 영령(英靈)으로 자위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고의 영웅호걸 모두 북망산 황천객 신세를 면치 못했을진대, 그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안식처는 돌무덤으로 남았을 뿐이다. 단, 그 망상에 날개를 단 조형물이나 기록은 당대 특정 역사상을 반영한 유물 대접을 받아 세인의 눈과 귀를 끌고 있는 것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진호)   




서비스사진 첨부



넴룻산 근처 유적지 분포도




머리만 떨어지고 상체와 다리만 남아있는 석상




석상 뒷태




동쪽 테라스를 위에서 본 모습




 

아폴론 미트라스 얼굴




안티오코스 1세 얼굴




  가이드집에서 저녁을


가이드 대두집에 저녁먹으러 갔다가 가족사진 하나 남겼다. 아들 1(맨 뒷줄 오른쪽, 왼쪽은 조카)에 딸만 다섯인데 지금 와이프가 임신 7개월로 좀 있으면 총 7명이 된다. 노모를 모시고 있는데 이 마을이 쿠르드족 마을이다. 현재 전체 터어키 인구의 25%를 차지하는데 소외된 민족으로 주로 동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다. 이 쿠르드족 중 과격파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터어키 정부와 소원한 상태로 게릴라 조직등으로 터키 정부에 대항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질이 가난하게 살지만 사람들은 순박하다.  



이 집 장녀로 14살. 중학생



이 집 장손 11살.



이 집 둘째딸 9살



세째딸 7살



네째달 5살



막내둥이 3살. 애들이 저그 아부지 닮아서 이목구비가 잘 빠졌다. 단지 아버지 돈벌이가 시원찮아 좋은 집, 예쁜 옷, 맛있는 음식만 없을 뿐 다른 것은 다 있다. 여기 넴룻산 관광이 이스탄불에서 너무 멀어 관광객들이 잘 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대두는 날이 풀리는 5월부터 11월까지는 관광가이드하지만 나머지는 손님이 없어 카라카둣에 있는 내가 묵은 호텔에서 관리를 해 주고 월급을 받는데 한 달에 500리라(140불) 받는다 한다. 그래도 대두는 벌이가 조금은 있어 나은데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나 지어 근근이 사는데 눈이 오는 겨울 기간동안에는 집집마다 남정네들이  이스탄불에 가서 허드렛일 구해서 푼돈 모아 봄에 돌아 온단다. 쿠르도족들이 참 가난하고 섧게 살고 있다. 이집트에서 베두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손님왔다고 진수 성찬을 차려 내 놓는데 저 채소는 어제 아침에 먹어 본 것이고 왼쪽에 닭튀김같이 생긴게 닭이 아니고 야채 튀김이고 토마토와 새끼고추 절인 것(이게 별미다)에 하얀 수프같은 것은 맛이 조금 시금텁텁해서 입에 맛지는 않았고 그 옆의 수프는 크림수프같이 맛이 좋아 두 그릇이나 해치웠다. 중간에 있는 것이 밥인데 그 위에 간을 한 양고기를 구워 잘게 썰어  얹어 주어 맛이 있다. 일단 가장과 손님 둘만 먹어라고 하길래 애들 7명에 할머니, 와이프까지 9명이 지켜보는 방안에서 내가 저 위에 있는 얇은 빵에다 밥얹고 양고기, 채소, 고추까지 넣어 쌈싸먹어니  애들과 어른들이 전부 신기하듯이 쳐다 본다. 대두 이 녀석은 몇 숟갈 안먹고 배 부르다고 숟갈을 놓는데 나는 배가 무지하게 고파 허겁지겁 먹다 보니 어린 애들이 배는 고픈데 손님이 있어 못 먹는 모양이다. 그제서야 아비 대두의 깊은 속을 깨달아 나도 숟갈을 놓았다.




대두의 8인 가족 한달 생활비가 약 1000리라 하는데 미화 700불 수준이다. 그런데 그 정도도 이 산골 마을에서는 쉽게 만들지 못하는 금액이란다. 여름 한 때 관광 가이드 한다 하지만(내가 보기에 이 녀석 관광

가이드 수준은 거의 빵점이다. 영어도 그렇고 유적지 설명도 그렇고 단지 인간성이 바보라 할 정도로 순진하다.) 관광시즌에도 주 평균 1-2건이란다. 그래도 대군을 이끄는 대장군처럼 대두는 위풍 당당하게 살아 가고 있다. 넴룻산의 일출도 일품이고 낙조도 멋있다는데 일출은 포기하고 오늘은 낙조시간 맞추어 올라 왔지만 구름 때문에 망쳤다. 저 구름만 없어면 저렇게 활활타는 낙조를 한바구니 담아 갈 수 있을련만……  하여간 여기 넴룻산 근처의 산골 마을과 병풍처럼 둘러 싼 산들의 풍치가 너무 마음에 들어 다음에 여가 생기면 다시 와서 푹 고이게 몸과 마음을 담구어 보련다. 그 날이 또 언제가 될련지……………(넴룻기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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