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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자몽 May 31. 2020

오늘도 아내를 오해하게 했습니다

슬기로운 신혼생활 vol.5

이거 뭐지? 결제가 너무 많이 됐는데...


아내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며 말했다. 폰에는 지난 주말에 이용한 렌트카 결제내역이 찍혀 있었다. 아내의 말처럼 요금이 많이 결제된 것 같기는 했다. 예약할 때 알고 있던 액수의 세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당신이 전화 좀 해보면 안 돼? '이런 거' 잘하잖아.
응, 내가 내일 딱 말할게. 내가 또 '이런 거' 잘하지. 걱정마!


아내가 말하는 '이런 거'는 따지는 걸 말한다. 진상을 떠는 건 아니고, 소비자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억울하게 피해입는 일이 생겼을 때, 잘잘못을 따지고 내 권리를 주장하는 거랄까. 누구나 종종 그런 일을 겪고, 해결하기 위해 따진다. 아내는 내가 잘 따진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사실, 아내는 오해하고 있다. 나는 아내가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한여름 카페에서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잘못 나와도, 말하기 껄끄러워 땀을 뻘뻘 쏟으며 그냥 마시는 사람이다. 카드 명세서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결제내역이 있어도 전화하기가 부담스러워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이다. 다만, 지금 나는 아내의 오해를, 아주 적극적으로 방조하는 중이다.


아내의 오해는 결혼 전 처음으로 함께 떠난 해외 여행에서 시작됐다. 우리는 낯선 나라인 쿠바에 있었고, 쿠바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여행객의 지갑을 노리는 현지인이 많은 곳이었다. 노린다는 게 '훔친다'는 의미는 아니고,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우거나 잔돈을 바꿔치기 하는, 소위 '눈탱이 치는 일'이 많았다.


특히, 택시가 위험했다. 쿠바의 일부 택시 기사들은 각종 영업 노하우로 여행객들의 지갑을 공략했다. 쿠바 택시와 관련해 미리 많은 이야기를 들은 터라 우리는 택시에 탈 때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덕에 대놓고 눈탱이 맞는 일은 없었다.


딱 한 번, 여행 막바지에 만난 택시 기사가 택시 요금으로 장난을 걸어온 적이 있었다. 쿠바의 택시엔 보통 미터기가 없어서 탑승 전에 목적지를 말하고, 금액을 협의한다. 분명 사전에 요금을 합의했음에도, 택시 기사는 '잔돈이 없다'를 시전하며 더 많은 금액을 요구했다. 들고 있는 돈다발 사이에서 뻔히 잔돈이 보이는데도 막무가내였다.


평소였다면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자릴 떴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갑자기 잔돈이 없다고 하면 어떡하냐. 분명히 타기 전에 요금 얘기했지 않냐.
모르겠다. 기억 안 난다.
그럼 나도 모르겠다. 그냥 간다.
어딜 가냐. 돈은 주고 가야지!


서로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수분 간 손짓 발짓 섞어 실랑이를 계속했다.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주목하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는 약간 당황한 듯 했고, 나도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돈은 한 푼도 더 주고 싶지 않았다. 택시 기사에게 기다리라고 하고선 옆에 있는 가게로 뛰어들어갔다. 가게에서 잔돈을 바꿔와 정확히 사전에 협의한 만큼의 요금을 내밀었다. 택시 기사는 마지막까지 우리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다며 삐죽대더니, 결국엔 그 돈을 받아들고 떠났다.


상황이 끝나자 아내가 다가와 팔짱을 꽉 끼었다. 고갤 들어 올려다보는 아내의 표정에 어딘지 모르게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아내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한다. 그게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고. 평소에 보여주지 않았던 든든한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나는 굳이 아내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오히려 방조하기로 했다.


안방 벽지가 찢어져 있는데요. 여기, 여기, 여기.
꼭 도배는 새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흰색 옷이라 환불이 안 된다니요.
그런 법이 어딨나요?
애초에 타이어 관리가 잘못된 건데,
펑크난 걸 왜 저희가 책임져요?
결혼식 2주 남겨놓고 공사요?
철회하지 않으면 소보원에 신고할 겁니다.


손해보지 않고 살자니, 따질 일이 끝도 없다. 하지만 그런 덕에, 어디가서 호구 잡히지 않고 잘 살고 있다. 험난한 결혼 준비 과정도 별탈 없이 잘 마쳤다. 아내는 여전히 옆에서 든든해한다.


앞으로도 아내의 오해는 계속될 것 같다. 최소한 아내가 보는 앞에서는 잘 따지는 사람으로, 그래서 억울한 일을 겪었을 때 대신 따지고 싸워줄 수 있는 든든한 사람으로, 아내의 오해를 적극 방조할 생각이니까.


그때 그 렌트카 비용 절반 환불 받았어!
진짜? 역시 당신 최고야!


나는 오늘도 아내를 오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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