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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자몽 Jun 18. 2020

주식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인 줄 알았습니다

슬기로운 신혼생활 vol.7

이제는 희미해진 어릴 적 기억이 하나 있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어머니는 방문을 쉼없이 두드렸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지다 결국 어머니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었다. "일단 얘기 좀 해엣!" 그제서야 방문이 살짝 열렸고, 열린 문틈 사이로 활짝 열린 창문과 그 앞에 놓인 의자 하나가 보였다. 거침없이 문을 밀고 들어가는 어머니를 향해 이번엔 아버지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죽어버릴 거야아~"

그날 사달의 원인은 '주식'이었다. 당시에 아버지는 주식을 꽤 많이 산 모양이었다. 부자가 되어보겠다는 심산이었겠으나, 주식 시장은 소시민의 소망을 품어줄 만큼 너그러운 곳이 못됐다. 아버지의 꿈은 힘없이 꺾인 그래프와 함께 바닥을 지나 지하 깊은 곳 어딘가에 처박혀버렸다. 이후로, 우리 가족 사이에서 주식은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금기가 되었다. 가끔 주식이 입에 오르내릴 때라 해봐야 도박과 함께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거나 담배와 더불어 '절대 시작을 해선 안 되는 일'로 일컬어지는 게 전부였으니, 우리 가족의 주식에 대한 적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하다.

그런 내게 아내는 쿠팡 쇼핑 목록을 보여주듯 주식 보유 목록을 보여주며, 근래에 산 종목들을 자랑했다. 내심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청소년기 내내 주식을 향한 적대감에 노출돼 온 탓에, 마치 보면 안 될 걸 본 것마냥 고갤 돌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눈은 뇌보다 빠르게 벌겋게 달아오른 숫자들을 인식했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폭발하는 거래량과 높아져가는 호가가 세운 새빨간 불기둥에서 눈을 떼기란 쉽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스스로가 설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증권사 계좌를 트고, 얼마되진 않지만 출퇴근과 맞바꾼 소중한 돈을 입금했다. 아는 게 없으니, 일단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주식 몇 주를 샀다. 워낙에 뜨거운 장이 이어지던 시기였던 덕에 내가 산 주식들도 빨갛게 익어갔다. 10프로 남짓 수익을 봤을까. 십수년 인생을 지배해온 주식에 대한 경계심은 눈녹듯 사라지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은행 계좌의 돈이 야금야금 증권사 계좌로 옮겨갔다. 은행 계좌에 있을 땐 가만히 죽어 있던 잔고가 증권사 계좌에선 살아나 붉게, 푸르게 펄떡였다. 그 힘찬 펄떡임이 좋아서, 나는 점점 더 주식 투자에 마음을 뺏겼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게 없듯 주식도 오르기만 할 순 없었고, 바야흐로 하락장이 도래했다. 주식 투자를 시작한 이후 처음 맞는 하락장은 예상보다 매서웠다. '코스피, IMF 넘는 최대 폭락', '한국 증시,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 같은 뉴스를 들으면서 주식 창을 보고 있으면, 가만히 있는데도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그간의 수익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익률이 -30프로까지 떨어졌을 때, 머릿속에 스치듯 떠오른 건 방문을 걸어 잠그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역시, 자식은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이야. 지금 더 사야 돼." 아내의 목소리는 냉철했다.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주식을 더 사라고?' 아내가 나를 조롱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아내의 확신에 찬 모습에, 홀린 듯 떨어지는 칼날을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칼날은 바닥에 튕겨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낮아진 평단가 덕에 손해가 빠르게 줄었다. 수익률이 금방 +로 반전됐다. 이른바 '물타기' 투자 전략을 그때 배웠다.

"스승님 덕이지." 주식이 다시 올라갈 줄 어찌 알았냐는 물음에 아내가 답했다. 아내에겐 조언을 해주는 스승님이 계셨다. "주식이란 오르면 내리고 내리면 오르는 법이니, 내렸을 때 더 사고 올랐을 때 팔면 된다."  아내의 스승님께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다소 뻔한 말이었으나, 그땐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스승님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아내는 가끔 스승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십수 년을 주식 시장에 있으면서 한 번도 손절한 적이 없다는 둥 차트만 봐도 주식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다는 둥 주식창은 하루에 딱 한 번만 본다는 둥, 하나 같이 믿기 힘든 것들이었다.

얼마 뒤 스승님의 정체를 알고 깜짝 놀랐다. 의외로 가까이 계셨다. 다름 아닌 장모님이었다. 장모님께선 오래 전부터 주식 투자를 해오신 듯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완 달리 꽤 성공적인 투자를 하시는 것 같았다. 아내도 장모님을 따라 일찍이 주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런 저런 투자 조언을 주고받는 엄마와 딸이라니, 자본주의의 전설 같은 모습이 아닐까. 어쩌면 아버지가 주식 투자에 실패한 그날이 아니었더라면, 아버지와 나도 같은 모습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약간은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요즘 아내는 장모님을 닮은 투자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경제 방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팟캐스트부터 유튜브, 경제 신문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각종 정보를 빨아들이고 있다. 최근에는 투자 관련 책들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재무제표 읽는 법부터 경제학까지 상당한 수준이다. 나도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씩 공부를 하고 있다. 직감이 아닌, 내 나름의 투자 논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게 주식은 더이상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아니다. 나약한 월급 생활자로서, 폭풍 같은 자본주의에 맞설 유일한 수단이자 희망이다. 주식 시장에 남아 있는 이상, 앞으로도 위기는 닥칠 것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 아버지처럼, 혼자 방문을 걸어 잠글 일은 없어 다행이다. 함께 투자하는 아내가 있고, 조언을 구할 장모님이 있다. 여러모로 결혼하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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