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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자몽 Aug 12. 2020

용돈 받아 쓰시나요?

슬기로운 신혼생활 vol.10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사. 용돈 받아 쓰기 시작하면 못 산다니까."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먼저 결혼한 지인들이 조언했다. 빚을 내서라도 사고 싶은 것들은 당장 사라고. 결혼을 하면 내가 버는 돈도 내 돈이 아니라고 했다. 흘려듣는 척 했지만, 사실 조금 불안한 마음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겨우 용돈 받는 처지에서 벗어났건만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용돈 받는 삶이 시작된다니 걱정이 앞섰다.


그즈음 회계 팀에 있는 동기가 넌지시 물었다. "다른 계좌 등록해줘?" 회사에서 나오는 월급 외 소소한 수당들을 월급 계좌가 아닌 별도의 계좌로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얘기였다. 동기의 증언에 따르면, 회사의 유부남 대부분이 아내가 모르는 비밀 계좌로 수당을 받아 비상금을 만든다고 했다. 부족한 용돈으로 생활해야 하는 유부남들의 처지가 낳은 궁여지책이었다. 왠지 용돈이 부족해 잠자는 아버지의 지갑에 손을 대던 청소년기 시절이 떠올라 애잔한 기분이 들었다.


"월급이 얼마야?"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벼운 말투였지만, 결코 사소한 물음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내는 미끼를 던지고 있었다.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월급을 좀 줄여서 말해볼까. 의심하려나. 용돈을 얼마나 부르지. 정녕 용돈을 받아써야 하나. 지난주에 장바구니에 담은 신발이나 미리 결제할걸...'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가는 사이, 아내는 그간 고민해온 문제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생활비는 얼마나 쓰고, 저축은 얼마나 해야 할지, 미래에 내 집 마련을 위한 목돈은 어떻게 모아야 할지 같은 것들이었다. 가계 경제를 위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당장 다음 달부터 변화가 생길지 모를 주머니 사정이 걱정됐다.


"나 용돈 받아 쓰는 거 싫어!" 불쑥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잠깐의 침묵과 함께 아내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왜? 내 주변엔 다 용돈 받아서 쓴다던데." 아내가 눈을 흘기며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다. 초조함에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아닌데, 내 주변엔 용돈 받아서 쓴다는 사람 거의 없던데. 그리고 용돈 받아서 쓰는 게 얼마나 안쓰러워 보이는지 몰라. 다 큰 어른이 월말만 되면 용돈 떨어졌다고 어쩔 줄 모르는 게..." 쿵쾅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말하다보니 약간 떼쓰는 것 같은 말투가 돼버리고 말았다.


한 달 동안 번 돈을 고스란히 집에 가져다주고, 그중 일부를 '용돈' 명목으로 배분받아 쓰는 게 싫었다. 겨우 일군 경제생활의 주체성을 잃고 부모님이 주는 돈을 받아 쓰던 어린 시절로 퇴보해버린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돈 관리를 아내와 완전히 분리하기는 어려웠다. 공용 생활비도 필요하고, 목돈 마련을 위한 저축도 해야 했으니 어떻게든 돈을 모아 함께 관리해가는 게 효율적이었다.


"정 그렇다면 월급을 반씩 모으자!"

"일종의 세금인 건가?"

흘긴 눈을 거두고, 곰곰이 생각하던 아내가 제안했다.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게 정 싫으면, 세금처럼 일정 비율을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이 말은 한 달 소득에서 정해진 비율만큼 내고 나면, 나머지는 자유롭게 쓸 수 있단 의미였다. 국가 경제를 위해 세금을 걷듯, 가계 경제를 위해 세금을 걷겠다는데, 가계에 소속된 일원으로서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용돈을 받아서 쓰는 것에 비하면, 경제활동의 자유가 월등히 보장된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협상안이었다.


"그럼 국세청은 누구야?" 속마음을 감춘 채 못 이기는 척 내가 물었다.

"그건 당연히 나지!" 아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지금은 매달 소득의 60%를 '가정세'라 이름붙인 세금으로 내고 있다. 세금 징수도, 탈세 감시도 아내가 맡고 있으니, 용돈을 받아서 쓰는 것과 실상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용돈'을 받아서 썼다면 받는 족족 써버리고 돈이 떨어지면 굶는 경제 관념 제로의 삶이 되었을 텐데, 용돈을 받는 대신 '세금'을 낸다고 하니 소득의 40%도 소비와 투자를 분리해 계획적으로 쓰게 된다. 근근이긴 해도 경제생활의 주체성을 잃지 않은 셈이다. 또, 용돈을 받아 쓰는것과는 달리 소득이 늘면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희망이 아주 작게나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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