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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자몽 Apr 21. 2020

요즘 시대에 제사 지내는 집? 그게 바로 저희 집입니다

슬기로운 신혼생활 vol.1

"할아버지 제사에 같이 올 수 있니?"

엄마의 목소리에선 왠지 기대감이 느껴졌고, 내 마음은 출렁였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결혼하고 처음 맞는 제사였다. 그리고 엄마는 그곳에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제사를 지내냐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만 들어가도 제사 문제로 갈등을 겪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녕 고부갈등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제사 그거, 좀 미루면 안 되나?"

정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우릴 굽어살피고 계신다면, 날짜 바뀐 것쯤은 금세 아시겠지. 할아버지도 갓 이룬 가정의 따끈따끈한 평화가 더 중요하단 걸 이해하시겠지. 그런 마음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제삿날을 어떻게 바꾸니?"


고향 집으로 향하는 KTX 안에서 나는 왠지 아내의 공포를 해소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휩싸였다. '제.사.'라는 거대한 두 글자가 뿜어내는 위압감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니, 그 두 글자에 가득한 김을 빼내고자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혹시나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우리 집은 할아버지 제사밖에 안 지내. 정말이야, 1년에 한 번뿐이라니까. 그리고 말이 제사지 막상 가보면 별 거 없어. 굉장히 간소해. 시장에서 전 좀 사다가 제삿상 올려놓고 그냥 가족들끼리 밥 먹고 헤어지는 거야. 그냥 생일파티라 생각해,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파!"


'제.사.'라는 두 글자의 위엄을 겨우 조금 쪼그라트렸을 즈음, 홍동백서, 조율이시, 어동육서... 같은 단어들이 쉴새없이 날아다니는 한가운데서 제기를 닦고 있었다. 아내는 어느덧 엄마와 작은 어머니들로 구성된 무리에 껴서 열심히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 거리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제삿상 한가득인 음식의 가짓수가 눈에 들어오고, 괜스레 친척들의 머릿수를 헤아려 보게 됐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나는 정말로 우리 집 제사가 간.소.한 줄 알았다. 그래서 방심했다. 하지만 '간소하다'는 말은 함부로 갖다 쓰는 게 아니었다. 제사를 지내는 이상 그것은 애초에 간소할 수가 없었다.


"고기가 여긴가? 아니 저 뒤로 놔야지. 아니 오른쪽."

고깃덩이를 들고 우왕좌왕하는 작은 아버지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나는 이 판의 동조자가 아님을 어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 좋아하던 거 앞쪽에 놓으면 되지. 그리고 아무데나 놔도 좋아하시는 거는 알아서 다 드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 철학은 시련을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홍동백서와 어동육시에 동조하지 않은 대가를, 집안 어른들의 참혹한 잔소리를 견디는 것으로 되갚으며, 생각했다. '과연 제사란 무엇인가.'


'우리 집이 이렇게 전통을 중시하는 집안이었나?', '우리 부모님이 원래 이렇게 보수적이었나?'

결혼을 하게 되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어쩌면 배우자는 새로운 가족인 동시에 내가 우리 집에 초대하는 손님이기도 하니, 옳고 그름을 떠나 그동안은 신경쓰지 않고 지냈던 것들을 되짚어 보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명절이나 제삿날 집안을 꼭 한 번 유심히 살펴보길 권한다. 그럼 "우리 집 제사는 별 거 없어!"라거나 "명절에도 하는 거 없어!"라거나 "우리 부모님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라는 말을 내뱉기 전에 조금 더 신중해질테니... 그리고 만약 결혼 상대가 감히 그런 말을 하거든, 알아서 잘 걸러들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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