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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자몽 May 26. 2020

유부남 직장인의 휴일(feat.집안일)

슬기로운 신혼생활 vol.4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링에 오르기 전까지는.

마이크 타이슨의 유명한 말처럼, 휴일을 맞이한 내게도 꽤 훌륭한 계획이 있었다. 집안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침엔 좀 느긋하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남은 인생에 출근으로부터 자유로운 날이 얼마나 되겠냐는 핑계로 알람도 맞추지 않았다. 해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데까지 올랐을 때 일어날 심산이었다. 다만, 일하러 나가는 아내가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느낄 상대적 박탈감을 배려해 출근길 배웅은 빼먹지 않기로 했다.


잠에서 깨면 아점을 차려먹은 뒤, 그간 못 본 드라마를 봐야겠다. 그러곤 인테리어가 잘 된 카페에 나가 가벼운 소설이나 좀 읽어야지.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갈 예정이었으니, 그전까지 이런 여유롭고도 알찬 하루를 보내는 게 잠들기 전까지 내가 세운 휴일 계획이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겨우 잠에서 깨 잠옷바람으로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한 뒤, 침대로 돌아갔다. 10시가 넘어서 다시 깼으니,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늦잠을 잔 셈이었다. 저녁 약속이 있는 6시까진 무려 8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제 천천히 계획한 것들을 즐길 차례였다.


아점으로 토스트를 만들어 먹었다. 사놓은 식빵을 꺼내 굽고, 치즈를 얹었다. 계란 프라이를 만들고, 시골 할머니가 직접 키운 상추에 집 앞 행복마트에서 제로페이로 산 소스를 뿌려 식빵 사이에 끼웠다. 꽤 그럴듯한 레시피였다. 창문을 열어놓고 대낮의 동네를 구경하며,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왠지 여행지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갤 돌려 쌓인 빨랫감을 직시하기 전까진 정말 딱 그런 기분이었다.


넘치기 직전의 빨래 바구니가 헉헉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여행지의 늦은 아침 같은 정취는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애써 빨래 바구니의 밭은 숨을 무시한 채 보고 싶은 드라마를 켜다 문득, 퇴근하고 돌아올 아내가 떠올랐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더니 기다리고 있는 거라곤 복부 팽만감을 견디지 못해 빨랫감을 토하는 중인 빨래 바구니라니. 아내의 가슴엔 분노의 불꽃이 일렁일 테고, 그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를 집어삼키고 말겠지.


드라마는 빨래만 돌려놓고 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빨랫감은 생각보다... 많았다. 불과 얼마 전 빨래를 돌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양이 아니어서, 빨랫감을 종류별로 분류했다. 흰색 계열의 옷과 어두운 계열의 옷을 구분할 만한 엄두는 감히 내지 못했고, 그나마 울샴푸로 빨아야 할 것들과 일반 세제로 빨아도 될 것들만 추려냈다.


일반 세제 빨래를 돌려놓곤 드라마를 보려는데, 이번엔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 작아선지 고갤 돌릴 때마다 해야 할 집안일이 눈에 띄었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부지런해지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땅이 작아서 부지런한 게 아닐까. 아무튼 이번엔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토스트 하나 만들어 먹었을 뿐이지만, 싱크대엔 세 끼니의 설거지 거리가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던 어젯밤 아내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녁밥에 야식까지 차려먹곤 호기롭게 외쳤었다. "설거지는 내일 내가 쉬면서 할게!"


냄비부터 시작해 그릇, 수저 순으로 쌓인 설거지 거리를 씻어냈다. 세제를 칠하고, 물로 헹궈내는 작업을 한참 반복하고 나자 싱크대가 바닥을 내보였다. 배수구에 걸린 음식물 찌꺼기를 툭툭 털어내고, 사이사이 끼어 떨어지지 않는 것들은 손으로 긁어냈다. 털어내고 긁어낸 음식물 찌꺼기들을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조심히 모아, 냉동실 한쪽에 살포시 놓아주었다. 그렇게 지난한 작업을 끝마치고나서야 다시 원래의 휴일 계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거실 테이블에 앉았더니 이번엔 발바닥에 뭔가가 붙었다.

이제는 정말 드라마를 보려는 참이었다. 서서히 발바닥을 뒤집어 봤더니 토스트에 끼워넣었던 작은 상추 조각이 붙어 있었다.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물티슈 한 장을 꺼내  발바닥에 붙은 상추를 떼냈다. 반도 못 쓴 물티슈를 그냥 버리기 아까워 거실 바닥을 슬쩍 닦았다. 실수였다. 바닥을 닦은 물티슈는 금세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겨우 오프닝을 넘어간 드라마를 멈춰야만 했다. 물티슈 한 통을 통째로 동원해 거실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수많은 먼지들은 어디에서 온 걸까. 누군가 우리집 거실에서 신발을 신은 채 족구라도 한 판 한 걸까. 머리카락이 이렇게나 빠져대는데, 어떻게 아직 왁스를 바를 수 있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들락거렸다.


바닥 닦기를 끝내고 허리를 세우자 세탁기 알림음이 울려왔다.

빨래가 끝났다.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어찌할 수 없이 단조로운 알림음을 따라서 세탁실로 향했다. 세탁기 문을 열어 가득찬 빨래를 끄집어냈다. 심신을 안정시킨다는 라벤더향 다우니가 그나마 잠깐의 위안을 주었다. 젖은 빨래를 들쳐업어다 건조기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울샴푸로 빨아야 할 남은 빨래를 돌렸다.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에 빠진 기분이었다. 고갤 들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천장에 붙은 에어컨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곧 에어컨 필터도 청소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흠칫해 얼른 고갤 흔들었다. 에어컨 필터 청소는 좀 더 더워지면, 아니, 많이 더워지면 해야겠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4시를 향해 있었다. 

약속 시간인 6시까진 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씻고 나와 건조가 끝난 빨래를 개어 놓고, 새로 한 빨래를 건조기에 넣으면 딱 시간이 맞겠다. 드라마는 지하철에서나 봐야지. 휴일 하루가 다 갔다. 여유롭고도 알찬 휴일은 무슨, 유부남 직장인의 휴일은 이렇게나 바쁘다. 퇴근하고 집에 온 아내에게 생색이나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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