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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자몽 Aug 28. 2020

아내는 원래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슬기로운 신혼생활 vol.11

퇴근길 아내 손엔 필라테스장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파랑 노랑 원색으로 뒤섞인 전단지에 큼지막하게 적힌 '선착순 30명', 회당 9,900원' 같은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 필라테스 할라구!"

아내가 전단지를 내밀며 선언했고, 나는 그 전단지를 받아들며 크게 고갤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에게 운동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매일 아침, 아내가 호소하는 만성 피로의 원인이 '운동 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시작할 거냐는 물음에 아내가 대답했다.

"이미 등록했어!"

아내는 A4용지 절반 만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상단에 계약서라고 적혀 있긴 했지만, 사실상 계약서로서 구실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대부분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을 거라는 선언이었고, 환불했다간 본전도 못 찾을 거라는 협박이었다. 그나마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적혀 있었으니, 영수증 정도의 의미는 있어 보였다. 동네 스포츠센터 계약서가 뭐 다 그러려니 넘어가려는데, 구석에 깨알같이 적힌 오픈 예정일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으로부터 3주도 더 뒤의 날짜였다.

"결제도 했어?"
", 1  100 !"

"카드로 했지?"
"현금으로 냈는데?"

"안에 시설은 둘러봤어?"
"공사 중이래서  봤지..."

잊을 만하면 꼭 한 번씩 튀어나오는 뉴스 기사가 뇌리를 스쳤다.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 시설에서 장기 회원권을 끊었더니 어느 날 폐업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등장하는 피해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혹해 6개월, 1년치 이용료를 현금으로 선결제했다고 진술하곤 했다. 매번 반복되는 기사를 보면서, '대체 뭘 믿고? 순진한 사람들...'이라며 혀를 끌끌찼었다. 그런데 그 바보처럼 순진한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오픈하기는 ?"
"당연히 하지~"

"오픈은 했는데, 시설이 별로면?"
"필라테스장 시설이  거기서 거기지, ~"

"카드로 하면 취소라도 하지..."
",  불안하게 하지마아!"

걱정 많은 나와 달리 아내는 참 태평했다. 먹튀, 사기, 폐업 같은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장악해나가는 와중에도, 아내는 느긋하게 운동복을 골랐다. 카드로 다시 결제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시설 구경이라도 하고 오자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아내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미간을 찌푸려가며 내 말을 막았다.

"어허!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랬다. 그간 잊고 지냈을 뿐 아내는 원래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대학 시절 별명이 '한량'이었을까. 엉뚱한 데서 튀어나온 아내의 옛 모습이 왠지 반가웠다.

연애 시절을 회상해보면, 매사에 걱정 없는 아내의 모습이 좋았다. 아내는 미래를 걱정하기보단 현재를 즐길 줄 알았다. 취준생 시절 카페에 앉아 걱정 거리를 쏟아내고 있으면, 입에 초코 케이크 한 조각을 넣어주며, "맛있지? 잘될 거야!"라고 말해주곤 했다. 구김살이 없어 남의 말을 꼬아 듣는 법이 없었고, 뭐든 잘 될 거라 믿는 덕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력이 남달랐다. 한마디로 말해 심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시작한 뒤로 한동안 아내는 원래 성격을 많이 잃어버렸다. 영업 분야에서 일하면서 매일같이 여러 사람을 상대하려니, 적당히 말을 꼬아서 할 줄도, 꼬아서 들을 줄도 알아야 했다. 심플한 성격은 눈치 없는 성격으로 비쳐져 미움을 사기도 했고, 상대방을 쉽게 믿었다가 뒤통수 맞는 일도 왕왕 생겼다. 전처럼 걱정 없는 한량으로 지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이번에 필라테스를 등록하러 가서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자칭 상담 실장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만 믿고, 오픈까지 3주 넘게 남은 매장에, 시설은 구경도 못한 채, 100만 원을 현금으로 결제하고 왔다. 낙천적이고 의심할 줄 모르는 예전 그 심플한 한량의 귀환이었다. 아내완 달리 의심과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으로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아내의 연애 시절 모습을 떠올리게 돼 묘하게 흐뭇한 기분이었다.

꾸준히 먹튀 사기 가능성을 언급하는 남편 탓에 아내도 신경이 쓰이긴 했는지, 필라테스장이 입점한다는 건물을 지날 때면 아내는 건물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아내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한마디씩 했다. "아직도 간판을 안 달다니 이상하지 않아?", "전화 한 번 해봐. 안 받는 거 아니야?" 그러면 아내는 또, 미간을 찌푸린 채 노려보며 말했다.

"자꾸 불안하게 하지 말아라, 으잉!?"

그러길 보름쯤 지났을까. 퇴근하고 돌아온 나를 아내가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아내의 얼굴에 비친 음흉한 미소는 마치 승리를 직감한 승부사의 미소 같았다. 아내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대곤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간판 달렸다~"

무사히 오픈한 필라테스장에 아내는 잘 다니고 있다. 적어도 아직까진 필라테스장이 먹튀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가끔 1년치 다 다니기 전에 문 닫는 거 아니냐며 아내를 위협하곤 하지만, 아내는 한결같이 태평할 따름이다. 사실 그래서 다행이다. 앞으로도 부디 아내가 태평할 일들만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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