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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Oct 27. 2018

아들의 까막눈 탈출기

엄마 새로운 세상이 열렸어요.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이가 한글을 일찍 뗄 리 만무했다. 걸음도 때가 되어 걸었고 말은 늦게 튼 편이었으며 대소변은 무척이나 늦게 가린 편이었기에 무언가를 시기보다 빨리 해낼 거라는 생각은 일찍부터 없었다. 그래도 키가 크고 운동신경이 좀 있는 편이라 주변에서 신체활동이나 몸 쓰는 일로는 칭찬을 많이 받는 편이었는데 올 봄 유치원 운동회 달리기에서 4명 중 4등을 하고서는 그 자신감마저도 쏙 들어가 버린 참이었다.


비단 아이뿐 아니라 엄마의 성향도 아이에게 무언가를 애써 가르치거나 앞서 나가길 바라는 욕심도 의지도 없었기에 아이가 한글을 못 떼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미 모든 정보가 주입된 답안지 같은 애들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좀 맴돌다 뒤늦게 찾아가더라도 넓게 훑고 여러 곳에 관심을 뿌리다 제 길로 들어섰으면 싶었다. 필요한 부분은 최대한 늦게 짧은 시간 거치고 가면 아이도 덜 스트레스 받고 더 효과적일 것이란 나름대로의 신념도 있었기에 주변 아이들이 하나 둘 한글을 떼어가도 그리 조급하지만은 않았다.


콩깍지 사랑인지는 몰라도 멀대같이 큰 아이가 까막눈인 것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무엇보다 한글은 어휘력이 받쳐주고 관심이 생겼을 때 굳이 뗀다는 기분 안 들고 쉽고 가볍게 떼고 가길 바랐기에 더 느긋한 마음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멈칫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달리기 해프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이었다. 정기적으로 있는 영유아 검진의 자가 테스트를 위해 아이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대근육, 소근육 발달과 사회성, 신체발달 등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발달을 보이고 있었고 다만 인지 부분이 다소 마음에 걸려 고개를 갸우뚱하던 중이었다. 말로 할 수 있는 어휘력에 엄마, 아빠뿐 아니라 신호등 같은 단어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점수를 낮추고 패스하려다 혹시나 싶어  엄마, 아빠를 쓸 수 있는지 물었고 아이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하며 내게 엄마, 아빠를 써주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글자 순서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위아래 거꾸로 뒤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랑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아이가 내가 보기에 제대로 된 글자를 써낸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잠시 숨을 골랐다. 차라리 못쓰겠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었는데 이상한 형태의 글자를 쓰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엄마인 나는 알아차려줘야 했다. 잠시 글자를 들여다보니 차츰 그 이유가 유추되었다. 유치원에 동갑내기가 없는 아이는 다섯 살 동생들을 빼고는 혼자만 글자를 몰라 형들이 쓰는 글자를 더듬더듬 눈동냥으로 배웠고 마주 앉은 형의 글자는 늘 뒤집어져 있었을 터라 늘 그걸 눈치껏 베껴 써왔던 것이다. 그런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짠했다. 글자를 써준 아이에게 마음을 추스르고 잘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조만간 한글을 떼주어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겠다고 다짐했다.   


조급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우선은 학기를 마친 후 방학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이와 시간을 보낼만한 장소를 물색하다 우연히 기사에서 ‘한글박물관’을 알게 되었는데 기사 댓글에 있는 한글 떼기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도 참고하며 바로 이거다 싶었다. 몇 가지 계획을 세운 뒤 아이를 인천에 데려오자마자 용산으로 향했다. 한글 창제에 관한 역사부터 블록 놀이까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아이는 패드를 이용해 손가락으로 개, 비행기 등을 써보는 활동을 유독 좋아했다. 박물관에서 특별한 놀 거리 없이 무려 네 시간을 놀다 온 뒤로 아이에게 한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수월해졌다.

그리고 아이가 한글 공부를 해야 할 만한 이유를 가슴에 심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는 ‘피카추’를 좋아하면서 가끔 피카추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피카추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친구고 피카추를 만나고 싶다면 일본이라는 나라에 데려다줄 것이며 사실 그 친구가 하는 말은 원래 일본어이니 일본말도 배우면 좋겠지만 그전에 우리나라 글자부터 아는 게 먼저라고 했다. 뭔가 빈약한 논리 같아도 아이 눈높이에 맞춘 흐름이라 그런지 엄마의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 들었다. 아이는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럼 나 한글 배울래.”  


처음에는 한글 단어를 그림에 오려 붙이며 쉽게 접근했다. 사물로는 이미 알고 있는 단어들로 흥미를 유발하고 오리고 붙이는 과정을 통해 몰입을 경험하며 하루 8~12개 정도 단어만 읽었다. 다음 날 양을 늘려 같은 양을 진행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했다. 그리곤 그림 보고 외워서 읽는 걸 방지하기 위해 그림을 가려 살짝 단계를 높이고 그게 익숙해지자 단어를 거꾸로 읽게 시켰다. 아이는 그림을 안 가리면 안 되냐, 읽는 순서를 바꾸면 안 되냐, 다른 글자로 바꾸면 안 되냐는 둥 여러 방면으로 타협을 시도하며 저항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단어의 양을 쌓아갔다.


신기한 것은 힘들다고는 하면서도 안 하겠다고는 하지 않았던 점이다. 그리고 아이는 하루하루 정말 달라졌다. 목소리에 힘이 붙고 삼시 세끼 차려내느라 힘든 엄마가 일정을 빼먹고 좀 쉬려고 하면 한글 읽기 안 했다고 오히려 나보다 더 열성적이었다. 그럴수록 욕심을 부리지 않고 쉬운 단계를 무한 반복해서 자신감을 키워주고 만만하다 느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고집을 놓지 않았다. 특히 쓰고 지우길 반복하며 연습할 수 있는 휴대용 보드판이 큰 도움이 되어주었고 이동시 차 안에서나 카페 등에서도 보조 교구로서의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

통 글자 단어를 단순히 읽기만 한 것이 무더웠던 8월의 약 열흘간이었다. 다시 한 동안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었다. 약 한 달 반이 지난 무렵 이전에 연습한 글자를 모두 읽을 수 있으면 더 진도를 나가고 읽지 못하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시 공부하기로 한 아이는 모든 단어를 한 번에 읽어냈다. 그래서 큰 글씨로 써진 읽기 연습용 책 한 권을 검색이나 추천 없이 서점에서 직접 보고 골라와 새로운 일정을 밟았다.


많은 양도 아니고 큰 욕심을 내지 않았기에 그럭저럭 따라 하는 아이가 내겐 자연스러웠던 반면 15분~25분 정도 짧은 시간이지만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아이남편에게는 꽤나 놀라운 모양이다. 심지어 나와의 관심사 공유를 위해 최근 시작한 일본어 학습용 히라가나 쓰기 노트를 아들에게 뺏기고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리둥절 했다. 아이는 한글뿐만 아니라 무언가 쓰고 읽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게 일어든 한글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엄마의 생각과는 다르게 아들은 오히려 무언가 배우고 싶은 아이였다. 자기 수준에 맞는 기회가 없어서 제대로 개발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드니 엄마의 무조건적인 방목도 최선은 아이라는 생각도 들고 아들을 새로 알아가는 시간이라 나름 의미가 있었다.     

아들의 이런 모습에 조금 적극적으로 가르쳐주자 싶어 언젠가 찾아보려고 출처만 기억하고 있던 사이트에 들어가 한글 자료 동영상을 시청했다. 엄마표 한글 떼는 방법을 꼼꼼히 알려주고 있었는데 전체를 따라 하기보다는 주요 맥락만 짚어줄 생각이었기에 미리 안 보길 잘했다 싶었다. 어휘력 확장과 통 글자 인지 등 기존 방식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추가하여 낯선 글자를 익숙하게 해 준다는 확신에다 귀, 물, 별처럼 뜻이 있는 낱글자로 세분화시켜 글자를 인지 시켜준다는 팁을 얻었다. 제주는 관광지가 많아 도로표지판을 보며 읽기를 하거나 지도를 보기도 했는데 아이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읽고 아빠에게 ‘귀’ 자는 몰랐는데 엄마가 알려줘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자랑을 했다.


가장 큰 수확이었다. 아이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정도의 학습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로 받침이 있고 없고를 구분하지 않고 쌍자음, 이중모음도 관계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읽기 연습을 해나갔다. 그저 아이 눈빛을 보며 이끌어 주고 무의미한 반복은 넘어가고 어려워하면 진도를 조정해서 아이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며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할 만큼의 진도만 나갔다.

평상시에 보던 만화의 제목을 읽을 수 있게 된 아이의 자신감은 현재 최고치다. ‘엄마 나 잘하죠’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렇게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아이는 자신의 능력치가 커가는 경이로움과 마주하고 있다. 그 경이로움을 발견한 아이를 덤덤히 지켜보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아이의 발돋움과 날개 짓에 기름칠해줄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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