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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an 03. 2017

아이의 첫 글자

엄마 내 눈에 '스'만 보여요


아이는 이제 곧 다섯살이 되지만 아직은 문자학습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이는 나에게 통문자 학습 등의 방법이나 읽기 독립이라는 수단에 대해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 '부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수용의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분간 까막눈 신세로 지낼 것이었고 그 만큼 행복할 터였다(그렇게 믿었다).


아이의 생각이 글자로 조합되기 전, 무언가로 구성되고 의도적으로 집중되기 바로 그전까지는 그저 자신에게 펼쳐진 넓고 넓은 세상을 온몸으로만 마주하길 바랬다. 그런데 장난감 로봇을 통해 '숫자'의 존재를 알게 되고, '알파벳'이라는 다양한 모양에 호기심을 느끼게 되면서 아이는 자주 읽는 '책 속 글자'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엔 인상적인 제목이나, 짧고 반복되는 단어의 소리 그대로를 흉내 내면서 음가에 맞춰 한 자 한 자 외워 '읽는 척'으로 시작했다. 그리고는 결국 가장 좋아하고 자주 접하는 티라노사우르스, 트리케라톱스, 스피노사우르스 등 무수한 공룡의 이름 속에서 반복되는 '스'자를 인지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스'자를 따로 놓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보고 아이에게 그 모양에 대해 실물이랄까, 현실감을 주고 싶어 이쑤시개 세 개로 '스'자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젓가락으로 '스'자를 만들어 자신의 능력을 뽐냈다. 아이에게 '스'자는 취미이자 자랑이었고, 마치 글자 하나와 사랑에 빠지고 말 것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단순한 관심이 점점 증폭되어 계속 보고 싶고, 오로지 그것만 보이고, 나만 보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지며 흡사 첫사랑에 빠진듯한 모습을 보는 듯 한 착각이 들게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세상은 변해 있었다. 매일 아침 어린이집 등원을 위해 손을 잡고 지나가던 풍경이 아이에게 달리 보이기 시작한 건 같은 건물에 위치한 헬스장의 홍보물에서 '스'를 발견한,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는 사거리 현수막 게시대에서 '스'자를 발견해냈다. 혼자서 '스!' 하고 되내어 보다가 그다음엔 엄마를 불러 그 발견을 공유하고 싶어하고, 또 그다음엔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스'자를 찾아댔다.


그저 지나치기 바쁜 우리 주변에 '스'가 들어간 글자가, '스'로 구성된 글자가 그토록 많은지를 아이를 통해 새로이 마주하게 되면서 나는 아이에게 새로운 세계 하나를 열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자를 소개했다. 동그라미에 기다란 짝대기 하나만으로 이뤄진 글자는 우선 단순해서 좋다. 또한 단어구성뿐 아니라 '조사'로도 쓰여 책에서 '찾아내기'를 하기에 그 어떤 단어보다 유용했다. 고양이의 '이'자로 시작해서 한동안 '이' 타령이 시작되더니 지금은 자신의 이름에서 시작한 '유'로 그 사랑이 이어지고 있다.

아이는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무려 세 개나 된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하고 흥분되어서 이젠 누가 저 글자를 먼저 찾을 수 있는지 내기를 거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내기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엄마가 먼저 찾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유'자가 어디 있는지 묻고는 내가 찾은 걸 못 본 척하고 다시 자기가 찾은 것처럼 굴거나 먼저 찾은 엄마를 원망하고 밉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를 만난 만큼 성큼 자란 아이지만 여전히 유아적인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을 경계하고 소유욕을 보이는 모습까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 글자 찾기 놀이에 빠진 아이를 바라보며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때의 젊은 날이 스쳐갔다. 이젠 그 추억에 푹 빠지지 않을 만큼 무던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열정이 내겐 남아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이의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 그토록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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