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에서의 하루가 지나 드디어 공연날. 첫 날 호스텔은 냉방 조절에 실패했는지 너무 추워 덜덜 떨다 잠이 들어 다음날 태양이 뜨는 게 정말이지 반가웠다.
운이 따라주어 다른 한국인 일행들과 일찍 줄을 설 수 있었는데, 기다리는 무리 속에서 그녀를 통해 새로운 중국인 친구를 소개받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여러 나라의 친구들이 있었고 여러 개성있는 여자친구들이 지금의 화젯거리나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섞여 시간을 보냈다. 나는 친구들이 말하는 동안 볼펜을 꺼내 그들을 그렸다. 원래 무대 위의 아티스트를 주로 그리는 나의 손 끝에 자신들이 담긴 것이 즐거운지 모두 크게 호응해주어 나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주로 도시와 사람을 담는 그림을 그린다. 뉴욕이나 도쿄같은 곳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채우는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 주로 사랑받는데, 동시에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역시 못지 않게 사랑받는 예술활동 주제가 있다. 그것이 바로 라이브드로잉이다.
라이브드로잉은 스케치 없이 순간을 빠르게 포착함으로써 찰나를 담아낸다. 옛날엔 카페나 거리, 공항같은 곳에서 해 오던 일을 어느 날 공연장에서 하기 시작했다. 인스타 친구인 정글님이 멤버로 계신 othersforgetyoubutnoti의 해방촌 라이브가 중요한 기점이었는데, 음악을 온 몸으로 느끼는 공연의 생생함을 담고자 그리는 그림들을 무대 위의 아티스트들도 무척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라이브드로잉은 ‘뮤직 라이브드로잉’으로 주제가 조금 더 선명하고 예리해졌고, 최애 아티스트의 서울 콘서트장, 이후엔 페스티벌에서의 야외 드로잉으로 이어지며 계속해서 지평을 넓혀 왔다. 그리고 오늘은 미국 투어의 첫 도시,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어린 때를 흡수한 곳에서의 라이브. 내게는 매우 귀중한 경험에 최대한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러가지 재료를 가방에 잔뜩 넣어갔다. 다행히 줄을 일찍 서 펜스를 작업 테이블 삼아 그리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거의 18시간을 거쳐 1만 키로미터 가까이를 날아와 맞이한 순간이 특별했음은 물론이다. 무대 위의 아티스트와 밴드를 보며 나는 비로소 인생에서 가장 먼 길을 떠나왔음을 실감했다. 그 무대 앞이, 내게는 세상의 끝이었다. 나는 내 세계의 끝까지 와서 사랑하는 음악을 그리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밤에 숙소로 돌아와보니 같은 방에 있는 이들이 곧 같은 공연을 본 사람들이었다. 옆 침대에 누워 콘서트 영상을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남미에서 왔다고 했다. 혹시 여행길에 만나는 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까 싶어 챙겨 온 그림 책갈피와 스티커 같은 것들이 요긴한 선물로 활용됐다.
호스텔은 이층 침대가 방 인원에 맞춰 배치되어 있다. 나의 윗층엔 새로운 게스트로 뮤지션이 와 있었다. 그녀는 내가 나간 동안 내 침대 앞에 뒀던 짐을 옮기며 보스턴에 공연을 하러 왔다고 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러 왔고 오늘 나도 공연을 봤다고 했는데, 아티스트를 보러 온 아티스트가 또 다른 아티스트를 만나는 우연도 그 날 밤의 소소한 재미다. 각자의 예술을 즐기는 방식이 조그마한 방 안의 모포 자락처럼 여기저기 놓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