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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nc 블랑 Oct 27. 2024

세상의 끝까지 너를 그리러 왔어

보스턴 (4)

보스턴에서의 하루가 지나 드디어 공연날. 첫 날 호스텔은 냉방 조절에 실패했는지 너무 추워 덜덜 떨다 잠이 들어, 다음날 태양이 뜨는 게 정말이지 반가웠다.


운이 따라주어 다른 한국인 일행들과 일찍 줄을 설 수 있었는데, 기다리는 무리 속에서 그녀를 통해 새로운 중국인 친구를 소개받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여러 나라의 친구들이 있었고 여러 개성있는 여자친구들이 지금의 화젯거리나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섞여 시간을 보냈다. 나는 친구들이 말하는 동안 볼펜을 꺼내 그들을 그렸다. 원래 무대 위의 아티스트를 주로 그리는 나의 손 끝에 자신들이 담긴 것이 즐거운지 모두 크게 호응해주어 나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주로 도시와 사람을 담는 그림을 그린다. 뉴욕이나 도쿄같은 곳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채우는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 주로 사랑받는데, 동시에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역시 못지 않게 사랑받는 예술활동 주제가 있다. 그것이 바로 라이브드로잉이다.


라이브드로잉은 스케치 없이 순간을 빠르게 포착함으로써 찰나를 담아낸다. 옛날엔 카페나 거리, 공항같은 곳에서 해 오던 일을 어느 날 공연장에서 하기 시작했다. 인스타 친구인 정글님이 멤버로 계신 othersmayforgetyoubutnoti의 해방촌 라이브가 중요한 기점이었는데, 음악을 온 몸으로 느끼는 공연의 생생함을 담고자 그리는 그림들을 무대 위의 아티스트들도 무척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미국 여행 내내 이 밴드의 음악을 정말 자주 들었다. 다른 이들은 너를 잊을지 몰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으리라는 밴드의 메시지가 너무나도 다정하기 때문이다. 이 밴드의 음악은 늘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준다).


나의 그림이 아티스트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그 감각. 그것은 내게 라이브드로잉의 기쁨을 눈 앞에 환히 비춰준다. 내가 그리는 목적은 성공이나 돈 이전에 타인의 행복에의 기여가 우선이다. 아주 어리고 아마추어였을 때에도 내 그림 앞에 단 한명이라도 멈춰서서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주고 그 사람의 몇 초간이 즐겁다면, 나는 그걸로 됐다고, 그게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 정말 나의 작업을 마음의 여운으로, 행복한 날로 기억에 남겨 줄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그것도 내가 영감을 받는 뮤지션들과 그림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실감이, 그야말로 '내가 살아있다', '내 작업이 역할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후 라이브드로잉은 ‘뮤직 라이브드로잉’으로 주제가 조금 더 선명하고 예리해졌고, 아티스트의 서울 콘서트장, 이후엔 페스티벌에서의 야외 드로잉으로 이어지며 계속해서 지평을 넓혀 오며 자연스레 지금까지 나의 주요 작업 테마로 정착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미국 투어의 첫 도시,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어린 때를 흡수한 곳에서의 라이브. 내게는 매우 귀중한 경험에 최대한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러가지 재료를 가방에 잔뜩 넣어갔다. 다행히 줄을 일찍 서 펜스를 작업 테이블 삼아 그리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거의 18시간을 거쳐 1만 키로미터 가까이를 날아와 맞이한 순간이 특별했음은 물론이다. 무대 위의 아티스트와 밴드를 보며 나는 비로소 인생에서 가장 먼 길을 떠나왔음을 실감했다.


그 무대 앞이, 내게는 세상의 끝이었다.


나는 내 세계의 끝까지 와서 사랑하는 음악을 그리고 있었다.


I.M <OFF THE BEAT> WORLD TOUR in Boston

'세계의 끝'에 도달하여, 그 곳에서 나의 아티스트를 그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라이브 공연은 그 정해진 시간 동안 세상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 존재하고 사라지는 특별한 순간이다. 다른 날에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모든 날의 노래는 모두가 다르다. 넓게 확장해 보면 (그렇다 나는 완전 MBTI N이다) 우주의 긴 역사에서 그 라이브의 그 곡을 느끼는 건 오직 유일하게 그 때만이 가능하다.


시간의 유한함과, 그래서 더 소중한 그 순간의 영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 이것이 나에게 라이브 공연의 의미라고 하면 너무 스케일이 거대해 보일까?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유일무이한 선율과 목소리를 감각하며, 산다는 게 이토록 한 순간순간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는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니 그 시간을 그대로 바로 내 손 끝으로 흘려 보내어 캔버스 위에 남긴다는 건, 삶의 영속적이지 않음에 대한 역설적 기쁨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한 편 또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좋아해서 세상의 끝까지 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을 내어준다'는 마음이다. 내 시간에 들어와 준 음악 또한,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노래가 존재한다는 걸 생각하면 찾아내거나 마주쳐 듣고 감동할 확률이 별처럼 희박하다. 내 하나뿐인 마음에 넓은 공간을 내어 준 아티스트는 더 그렇다.


우리의 타임라인이 인생에서 이렇게 닿아 공연이라는 형태로 공존하고 있는 이 순간 그 날 것의 시각적 결과물. 세계의 끝에서 다시 없을 애정을 담는다는 것. 나는 보스턴 라이브에서 라이브드로잉을 하며, 아마도 두 번은 똑같은 마음을 느끼지 못할 시간 속에 서 있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게 내게는 나에게 있어 가장 중한 활동을 할애함으로 실천되는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자신의 최애를 보기 위해 다양한 나라로 떠나는 것을 볼 때, 나의 일이 되면 어떨까 상상해보곤 했다. 경험해본 적 없는 건 내 경험이 되어야만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여기는 지독한 경험주의 지향자에게, 세계의 끝, 좋아하는 아티스트, 라이브드로잉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는 막연한 상상보다도 더 나를 바꿔 놓았다.


좋아해서 여기까지 할 수 있다는,

좋아해서 여기까지 온전히 나를 다 던져 봤구나 하는 살아있는 감각으로,

나의 좋아함은 완전함이 되었다.


Happily ever 로 끝나는 동화의 마지막장을 내가 스스로 그려냈다.


앞으로 계속 응원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한이 없다는 마음.


그것이 창균의 솔로 월드투어 보스턴 공연에서 드로잉하여 내가 얻은 마지막 별조각이었다.


공연관람용 생수를 손가락에 묻혀 '푸른 불꽃' 수채화를 시도해 봤다.




공연이 끝난 밤에 숙소로 돌아와보니 같은 방에 있는 이들이 곧 같은 공연을 본 사람들이었다. 옆 침대에 누워 콘서트 영상을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남미에서 왔다고 했다. 혹시 여행길에 만나는 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까 싶어 챙겨 온 그림 책갈피와 스티커 같은 것들이 요긴한 선물로 활용됐다.


호스텔은 이층 침대가 방 인원에 맞춰 배치되어 있다. 나의 윗층엔 새로운 게스트로 뮤지션이 와 있었다. 그녀는 내가 나간 동안 내 침대 앞에 뒀던 짐을 옮기며 보스턴에 공연을 하러 왔다고 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러 왔고 오늘 나도 공연을 봤다고 했는데, 아티스트를 보러 온 아티스트가 또 다른 아티스트를 만나는 우연도 그 날 밤의 소소한 재미다.


각자의 예술을 즐기는 방식이, 조그마한 방 안의 모포 자락처럼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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