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행운, 또 행운
아홉째 날. 이제 여행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하였다. 런던에서 편하게 쓸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시피 했기 때문에 남은 두 곳의 경기장을 마저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불린 그라운드를 찾았다. 불린 그라운드는 업튼 파크라고도 불리는데, 업튼 파크 역에 내리면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15-16 시즌을 마지막으로 웨스트햄은 불린 그라운드를 떠나 올림픽 스타디움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불린 그라운드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당시 빌리치 감독의 축구가 빛을 발하던 시기이고, 런던 연고의 프리미어 팀 중 가장 좋아하는 팀을 고르라면 웨스트햄을 꼽을 수 있기 때문에 불린 그라운드 역시 꼭 찾고 싶었던 곳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이라고 하니 더욱 가봐야 한다고 생각해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급하게 찾아갔었다.
보다시피 결코 규모가 작은 경기장이 아니고, 투박한 느낌이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입구 덕분에 경기장이 상당히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마치 성채와 같은 느낌을 주는 디자인인데, 웨스트햄의 엠블럼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디자인으로 이곳이 웨스트햄의 홈구장, 해머스(Hammers)의 집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경기장에 들어갈 방도도 없고 돌아보기에도 불편한 구조였지만,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워 계속 주변을 서성거렸던 기억이 난다.
입구를 가까이에서 보면 이런 느낌인데, 그야말로 귀엽다. 불린 그라운드는 웨스트햄의 골이 들어가면 나오는
비눗방울로도 유명했는데, 참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컨셉으로 구단을 운영해 나갔던 것이 아닌가 싶다. 주변을 계속 서성 서성 거리다 들어간 메가스토어에서도 생각보다 예쁜 물건이 많고 규모가 커서 한참을 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추천을 해 줄 수는 없지만, 웨스트햄이 워낙 매력적인 구단이기 때문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올림픽 스타디움을 찾아가더라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은 이청용 선수가 뛰고 있는 크리스탈 팰리스의 셀허스트 파크로 향했다. 셀허스트 파크도 로프터스 로드처럼 애매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노우드 정션 역이나 셀허스트 파크 역으로 향해 구글맵과 함께 길을 열심히 찾아가면 된다. 우리는 노우드 정션 역으로 갔던 것 같다. 지도에서는 버스를 타고 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멀지는 않은 거리니 여유가 있다면 걸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전형적인 영국의 주택가를 통해 길이 나 있어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
역시 아담한 경기장이다. 묘하게 언덕에 위치하여 있어 잘만 들여다보면 경기장 내부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빙빙 돌았었는데, 야속하게도 그라운드가 보이는 위치마다 정말 애매하게 내부를 보기가 힘든 구조였다. 밖에서 볼 때도 꽤나 독특한 구조인 것 같아 내부가 정말 궁금했는데, 아직도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경기장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크레이븐 코티지처럼 축구장 같지 않은 느낌이다. 메가스토어도 경기장 한편에 정말 아담한 규모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런던에서의 축구여행 계획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축구 여행이란 명목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까 쇼핑도 빼먹을 수가 없는데, 런던에 있으면 어느 정도 이름 있는 구단의 유니폼은 물론 영국 밖의 유명 구단 제품까지 거의 다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기장을 찾아가 해당 구단의 메가스토어에서 구매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만, 크리스마스나 시즌 말 세일이 아니라면 가격적인 메리트는 크게 없을 것이다.
런던에서 축구 쇼핑을 하고 싶다면 먼저 피카디리 서커스 역에 Lillywhites에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피카디리 서커스 역은 런던에 간다면 관광차 꼭 한 번은 가게 될 곳이다. 그야말로 '시내'의 느낌인데, 드라마 '셜록'의 오프닝에 나오는 광고판으로 유명하다. Lillywhites는 역에서 거의 내리자마자 찾을 수 있는데, 꽤나 다양한 구단의 유니폼과 상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해외 구단 유니폼도 많이 보유하고 있어 그냥 짬을 내어 구경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세일 규모도 비교적 큰 편이기도 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곳에서 사우트햄튼 달력(!)을 찾아서 구매했었다.
그리고 피카디리 서커스에서 한정거장 이동해 옥스포드 서커스로 가면 더 많은 선택지가 있다. (피카디리 서커스는 관광, 옥스포드 서커스는 실제 쇼핑 위주로 움직였었다. 옥스포드 서커스에는 나이키 스토어, 디즈니샵, M&M's 스토어, 니켈로디언 스토어, 버바검프 등 이곳저곳 돌아볼 곳이 많다. 가끔 영화 프리미어가 열리기도 한다.) 먼저 prodirectsoccer 매장이 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스포츠용품 체인점인데, 맨체스터나 리버풀 등 각종 도시에서도 매장을 볼 수 있지만 이곳 매장이 가장 크고 물건도 많다. 영국뿐 아니라 해외 구단 물건도 많고, 다양한 축구용품(각종 축구화와 이너웨어부터 심판 용품도 있다.), 스포츠용품, 의류 등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기본적인 옷이 급하게 필요하면 H&M이나 유니클로보다 오히려 이곳에 가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JDsports 매장이 있는데, 이곳도 매우 큰 스포츠용품 체인점이라고 보면 된다. 조금 더 고급스럽고 고가의 스포츠 브랜드가 많은 편이고, 나는 이곳에서 그렇게 찾던 사우스햄튼 홈 유니폼을 찾았었다. (마킹 서비스도 제공한다.) 영국에 가서 축구 관련 기념품을 사고 싶은데, 경기장까지 갈 여유가 없다면 이 3곳을 가장 추천한다.
이제 열째 날, 맨체스터로 이동해야 했는데 원래 계획은 맨체스터에 조금 오래 머물며 뉴캐슬과 버밍엄을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시간과 예산상 문제로 뉴캐슬을 포기하게 되었고, 뉴캐슬로 하루를 채우려던 우리의 일정이 붕 떠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일정을 고민하던 중 그 주가 fa컵 주간이라는 것을 알고 서둘러 표를 알아보았는데, 마침 리버풀에서 리버풀과 엑스터시티의 fa컵 재경기가 열려 한국에 있는 지인을 이용해 표를 알아보았다. 다행히 fa컵은 예매만 한다면 표가 남아있는 편이라 무사히 예매를 하고, 영국에서 볼 축구경기가 한 경기 더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하고 다시 찾아온 안필드. 숙소에 짐만 던져놓고 바로 리버풀로 넘어와 정신은 없었지만 한번 와본 곳이라고 그래도 능숙하게 찾아왔다. 문제는 우리가 실수로 표를 4장 예매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표가 없어 hospitality 티켓 중 가장 저렴한 티켓을 예매했었는데 (간단한 식음료를 제공해주는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일반석에 자리가 남아 먼저 예매한 티켓을 취소할 생각으로 일반석을 예매했지만 hospitality 티켓이 취소가 되지 않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일단 경기장에 가 티켓을 모두 찾아 어떻게 처리할지 서성거리기만 했다. 직원한테 물어보니 '파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일걸, 그런데 너네가 판다고 누가 사줄 것 같지는 않은데? 한번 알아봐 줄게.'라는 대답이 돌아와 어쩔 수 없이 티켓값을 날려야 하나 고민만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었다.
이때 경기장 근처에서 뭔가 불안한 표정의 동양인들을 얼핏 보았고, 말을 걸어볼까 망설이던 차에 그쪽에서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유럽 여행의 마지막을 리버풀에서 마무리하는 동갑내기에 동향 출신 친구들이었는데, 표가 없어 돌아가려는 참이라고 했다. 흔쾌히 일반석 티켓을 양도하고 자리로 가고 있는데, 인연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던 안필드에서의 축구관람이라는 기회를 선물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나까지 행운을 얻은 기분이어서 즐겁게 경기를 보러 들어갔다.
자리 자체는 첫 번째 경기보다 경기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훨씬 좋은 자리였다. 첫 번째인가 두 번째 줄로 기억한다. 우연히 보게 된 경기이지만 가장 좋은 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경기였다. 아무래도 fa컵이었고, 하부리그 팀과의 경기였기 때문에 관중석 분위기는 비교적 가벼웠지만, 그래도 안필드이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훨씬 열정적인 분위기였다. 두 번째 YNWA을 훨씬 힘차게 부르고, 나도 첫 방문보다 훨씬 즐겁고 여유롭게 경기를 지켜보았다.
2군과 1.5군 선수들이 많이 출전한 경기였지만 리버풀은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며 골을 하나씩 쌓아갔다. 조 앨런, 셰이 오조, 후안 테셰이라의 골에 힘입어 리버풀은 3:0 승리를 챙겼다. 앨런, 벤테케, 아이브, 테셰이라 등 지금은 볼 수 없는 얼굴들이 많았던 경기이지만, 영국에 와서 본 네 번째 경기만에 홈팀이 득점을 하고 승리를 챙긴 경기였다. 사실 세 번의 경기 내내 홈팀이 무득점 0:1 패배를 기록하여 홈팀이 승리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갈까 봐 매우 걱정하였는데 다행히 안필드에서 승리를 경험하였다. 승리 후의 안필드는 더욱 뜨거웠고, 즐거웠다.
짧은 동영상으로 콥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느껴 보시길 바란다. 정말 경기 내내 쉬지 않고 응원을 주도하는 것이 가까이서 보니 더욱 경이로웠다. 저곳에서 정말 축구에 대한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보았다. 지금도 저곳에서 경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안필드 경기를 볼 때마다 들고, 저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가 되어 불렀던 노래들과 이름들을 기억에 소중히 품고 있다.
화질이 좋지는 못하지만 경기 직후 선수들을 격려해주는 클롭 감독이다. 실제 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지만, 그 많지 않은 모습 만으로도 클롭이 얼마나 탁월하고 열정적인 지도자인지 알 수 있었다.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본 그의 제스처, 그의 행동은 충분히 뜨거웠고 선수들 역시 클롭을 잘 따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승승장구하는 리버풀의 모습이 단순히 놀랍지만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바로 위르겐 클롭이다.
경기 후 맨체스터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한 소녀를 만났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에게 그 소녀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너네도 선수들 기다리는 거냐'. 내심 궁금해진 나는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고, 소녀는 이 도로가 선수들이 차를 몰고 나오는 도로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럼 너도 선수들 만나고 싶지 않느냐'라고 물었고, 당연히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이때도 반신반의하는 생각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소녀를 따라갔는데, 길 중간에 있는 풀숲으로 들어가 갑자기 신호에 걸려있던 차에게 창문을 내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차 창문이 내려가고, 크리스티안 벤테케가 앉아있었다. 너무 놀라 정신이 빠진 나에게 소녀는 '사진 찍으세요 ㅇㅇ'라고 쿨하게 대답해주고는 내가 덜덜 떨며 벤테케와 사진 찍는 장면을 구경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소녀는 리버풀의 열성팬인 듯했고, 아예 선수들 차까지 외우고 있을 정도로 선수들을 많이 따라다닌 듯했다. 신호에 걸리지 않은 차를 보면서도 저건 누구 차다, 누구차다 라고 계속 설명을 해 주었다. 소녀가 세운 다음 차는 조 앨런의 차였다. 조 앨런은 매우 친절했고 끝까지 웃으며 사진을 함께 찍어주고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마르틴 스크르텔의 차가 신호에 걸렸다. 스크르텔은 소녀에게 너는 맨날 오냐며 너스레를 떨었고, 마침 그날 스크르텔의 이름을 새긴 유니폼을 자랑하는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쿨하게 떠났다.
영국 여행에서 가장 행운이 찾아왔다고 느꼈던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고, 정말 실감이 나지 않은 채 정신없이 선수들과 인사를 했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선수들은 매우 친절했고, 긴장하던 나에게 친절히 인사를 건네주었다. 지금은 세 선수 모두 안타깝게도 리버풀에 없지만, 다행히 모두 소속팀에서 주력 선수로 나서고 있고 건강하게 경기를 뛰고 있다. 이 세 선수를 볼 때마다 그때의 모습이 떠올라 추억에 잠기곤 한다. 아직도 세 선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오래오래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고 선수로써 성공적인 커리어를 써 나가기를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먼 나라에서 온 낯선 관광객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준 소녀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전하고 싶다. 잠시 스친 인연이지만, 평생 기억할 추억을 선사해 주었고 꿈을 이루게 해 주었는데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도 못 하고 정신없이 갈 길을 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아직도 있고, 아직도 리버풀의 경기를 볼 때 경기장 밖 어느 도로에 그 소녀가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우연하게 다시 찾아온 리버풀이지만, 잊지 못할 인연을 많이 만들어 준 하루였다. 친구를 만났고, 꿈을 만났으며, 축구를 만났다. 영국 여행에서 유독 행운이 많이 따른다고 생각하며 2주를 보냈는데, 특히 이 날은 정말 소중한 행운이 많았던 날이었다. 나에게 절대 잊지 못할 하루를 선사해 준 1월 20일의 리버풀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그렇게 길었던 열째 날이 끝나고, 열한 번째 날 아침에는 겨우겨우 기차를 잡아타고 버밍엄으로 출발했다. 이날의 일정은 아스톤 빌라의 홈구장. 빌라 파크에 가는 것과 간단한 맨체스터 시내 관광이 전부였다. 빌라 파크에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고 Witton 역으로 가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이드북이나 여행기를 찾아보면 버밍엄 시내 역으로 간 다음 전철을 타고 위튼 역으로 가라는 안내도 있는데, 맨체스터나 리버풀 같은 도시에 묵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위튼 역으로 갈 수 있다. Aston이라는 역도 있어서 헷갈리기 쉽지만, 위튼 역이 더 가까우므로 주의해서 내려야 한다.
사실 빌라 파크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빌라가 저 당시 워낙 성적이 좋지 않아 팀 이미지마저 뭔가 힘든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경기장 한 곳이라도 더 보자는 마음에 교통도 편하고 가까운 버밍엄에 있는 빌라 파크로 가기로 일정을 잡은 것이었다. 저 당시엔 아직 프리미어리그 팀이었고, 예전 강했던 '그 시절' 빌라의 모습을 볼 때마다 '빌라 파크는 예쁜 경기장'이라는 이미지가 있기도 했고.
내 기억 그대로 빌라 파크는 예쁜 경기장이었다. 경기장에서 풍겨오는 우울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마저도 분위기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예쁜 경기장이다. 빌라 파크는 투어가 매진될까 봐가 아니라 취소될까 봐 미리 예매를 해뒀기 때문에 매표소에서 표를 찾고 투어 프로그램을 위해 경기장으로 갔다. 영국에 가는데 축구를 보고 싶은데, 표를 예매하지 못했다면 성적이 (매우) 좋지 않은 지방 팀의 경기를 찾아보길 권한다. 이때 빌라 경기 표가 남아돌았었으니까....
빌라 파크에 대해서는 길게 쓰고 싶기도 하고, 사진도 많이 소개하고 싶다. 위 사진이 경기장 주 스탠드인데, (명칭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은 그대로 적고 있으니 궁금하시다면 구글링을..) 사진 오른쪽 아래 잘 보면 리셉션이 있다. 리셉션에서 가이드분을 만났는데, 그동안 다닌 경기장 중 처음으로 여성 가이드분이 나오셨다. 깔끔한 버건디 정장을 차려입으신 중년 가이드분은 자신을 '다이앤'이라고 소개했다. 투어 인원은 나와 친구 둘 뿐이었는데, 투어는 그대로 시작하였다.
투어 자체는 다른 경기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VIP 라운지나 기자회견장 같은 내부 시설을 돌고, 관중석에서 경기장 전경을 보고, 락커룸을 둘러보고 난 후 그라운드로 나가는 순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빌라 파크 투어는 유독 경기장 구석구석을 내어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인원이 나와 친구뿐이니 다이앤과 이야기도 많이 하고, 소소한 이야기들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으며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경기장 내부 역시 예쁘다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둘러봤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일단 색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버건디-하늘색 조합이 내가 유독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지만 관중석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정말 마음에 드는 인테리어였다. 사실 일반적인 투어였으면 이렇게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만한 투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투어 가이드 덕분에 영국 여행 중에 가장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다이앤은 일주일에 반만 근무하는데, 꽤 오랫동안 빌라에서 근무해 왔고, 직원에게도 경기장 자리가 나오기 때문에 주말마다 경기를 보러 온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느 팀을, 어느 선수를 좋아하냐부터 대학 진학과 한국 날씨까지 이것저것 물어봐 주며 함께 이야기했다. 우리가 짧은 영어로 더듬더듬 대답해도 친절하게, 그리고 진심이 느껴질 만큼 따듯하게 대답해 주었다.
락커룸에서도 다른 투어에서 들었던 식상한 이야기들이 아닌, 현재 팀 상황같이 빌라 파크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어떤 선수가 가장 잘 하고 있지만 팀이 어떻게 어렵고, 어떤 선수는 태도가 별로여서 감독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재밌게 들었었다. 얼마나 집중했었고 또 편했는지 나도 모르게 신나서 이야기하며 벤테케를 봤던 일을 자랑하고, 벤테케가 생긴 건 좀 그래도(?) 친절하지 않냐는 다이앤의 너스레에 맞다고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얼마나 좋게 기억에 남아있으면 이런 통로에서 했던 이야기들까지 하나하나 기억이 난다. 경기장에 나가는 문 오른쪽에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가끔 빌라의 감독이 다른 팀 감독과 경기 후 술 한잔을 하며 담소를 나누곤 하는 곳이라고 한다. (벵거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약간 깍쟁이 이미지인 듯..) 그리고 문 왼쪽에 잘 보면 트로피 보관함이 있는데, 빌라는 아무래도 역사가 깊은 클럽이기 때문에 현재 상황이 좋지 않아도 사람들의 자부심만큼은 대단했다. 비록 작년에 첫 강등을 맛보고 지금도 챔피언십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이날 이후로 나는 빌라를 지지하게 되었다. 역사와 전통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며, 힘든 상황을 빨리 극복하는 힘이 바로 세월에서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스티브 브루스 감독 아래에서 조금씩 반등하고 있는 아스톤 빌라가 이제는 꽃길만 걷기를, 하루빨리 프리미어리그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좋은 기억은 많이 나누고 싶어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소개하고 싶다. 영국에서 가장 즐거웠던 한 시간 반(투어 시간도 꽤나 길었다. 빌라 파크 혜자!)을 마치고 구단 메가스토어에 가서도 못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대한 추억을 많이 남기고 싶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고 폴로티 한 장을 집어 들고 나오는데, 이곳은 꼭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다시 찾아봐 다이앤도 다시 보고, 경기도 보고 싶은 경기장이다. 영국 여행 중 '여기가 참 좋았다.'는 생각을 한 곳은 많았지만 어디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빌라 파크를 택하겠다. 글을 쓰며 생각을 하니 꼬박 일 년이 지난 일이지만 잠시나마 행복했던 감정이 다시 든다. 이 글을 볼 수는 없겠지만, 최고의 추억을 선사해 준 다이앤과 아스톤 빌라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시 맨체스터로 돌아가 정말 별게 없었던 맨체스터 시내 관광을 마치고, (진짜 볼 거 없다. 이틀 저녁을 꼬박 맨체스터 시내에서 보냇지만 기억에 남는 건 한국식당에서 먹었던 신라면과, 정말 심심해서 했던 방탈출 게임 정도이다.) 여행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로 남아있는 열한 번째 날을 마무리했다.
이 글에서 썼던 순간들은 특히 운이 좋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다. 이 외에도 여행 중 정말 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특별한 경험도 많이 했었다. 아무래도 주제가 있는 여행이다 보니 운도 따라줘야 하고 걱정도 많았었는데, 여행이 끝날 때 즈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왔다는 생각이 많이 들 정도로 후회 없는 여행이었다. 이 글을 읽을 수도 없고, 아홉 시간 전의 시간 속에 살 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장소들에게 그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곧 끝날 여행이었지만 하루하루 일어나는 신기하고 또 소중한 일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 편을 더 쓸지 두 편을 더 쓸지는 모르지만,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