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눈 덮인 지붕 위 서서히 일몰 내리고
물기어린 눈빛 불그스레 물든다
저무는 하루는 언어의 파장이 굴절되는 창에 걸리고
저녁나절 연기로 피어오르는 이내
한 점 수채화로 선다
간간이 계절을 날으는 철새들의 막힘없는 날개짓
지루함 달래주는 시간
노을빛 물드는 눈꽃나무가 잡념을 정지시킨다
꽃은 나무의 가장 아리따운 미소라는 걸
이 고요의 순간에 무엇을 그려 넣을까
빈 공간 채우는 소리 없는 소리
자연의 설정에 하나의 풍경이 되어
낮게
깊숙하게
장충열 시집 『미처 봉하지 못한 밀서』에서
이 순간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아늑한 요람을 떠나 너무 멀리 온 건 아닐까. 고향이자 향수인 농촌은 뒤편 어딘가에 묻혀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화 도시화로 빠져나가기 전, 계절 따라 변모하는 풍경과 더불어 따뜻하게 등을 비비던 곳, 지금 그곳은 너무 먼 상상 속에 가 있다.
그러나 아침이면 여전히 반짝이는 햇살 아래 사물들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바람은 신선하게 대지를 깨우고 아파트 정원에는 환희에 찬 생명들의 분주한 움직임, 우리는 도시 한편에 이렇게 고향의 풍경을 걸어놓고 일상적인 삶의 중력을 견디는 중인지도 모른다.
장충열 시집 『미처 봉하지 못한 밀서』는 이러한 현실에서 마치 아늑한 고향을 봉할 수 없다는 듯 순수한 서정적 자아들이 자주 등장한다. 시 「여백」에서 화자는 수채화 같은 한 폭의 풍경에 골똘히 잠겨 있다. 포근하다 못해 시린 얼굴로 명징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 곧 찾아드는 ‘일몰’과 ‘이내’는 ‘철새들의 막힘없는 날갯짓’과 ‘노을빛 물드는 눈꽃나무’ 조차 서서히 어둠 속으로 몰아갈 것이다. 정지한 듯 고요하게 ‘눈 덮인 지붕’, 지붕을 넘어가는 ‘노을’은 숭고하면서도 처연하다.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 그리고 화자를 바라보는 독자도 그 서정의 진폭에 감동을 느껴 눈길을 고정하게 된다.
그런데 메를로 퐁티는 “모든 바라봄에는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이 깃들어 있다.” 고 했다. 내면으로부터 깊이 침잠하는 부드럽고 고요한 바라봄, 사라지고 바스러져 가는 것과 마주함은 고즈넉하다 못해 뼛속 깊이 애잔한 슬픔의 쾌를 일으키는 것이다. 점점 번져가는 여백에 ‘물기어린 눈빛 불그스레 물’ 이 들듯, 존재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저물어가는 이 현존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겠는가. 특히 “나”란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다.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와 독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미적 거리가 있겠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층위의 무게를 지닌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실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기에 일상의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 이나 ’잡념‘ 등 권태로움에 굴복하지 않고 이 순간만큼은 ‘빈 공간 채우는 소리 없는 소리‘ 에 귀를 기울이거나 ‘나무의 가장 아리따운 미소’ 인 ‘눈꽃나무’에 눈길을 멈출 수밖에 없다. 꽃조차 스러져 더욱 고요해지면 ‘이 고요의 순간에 무엇을 그려 넣을까’? 아마도 자연은 그 빈자리에 또 모호하고도 아름다운 존재들로 가득 채울지 모른다.
짧은 시편이지만 서정적 울림이 크다. 시인은 저녁 무렵에 마주한 설경의 한 순간을 통해 고요함 속에 피고 지는 세계의 진실을 포착한다. 마치 독일 화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나타난 비움의 미학 같은, 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가 느껴진다. 다만 그곳에서 아늑했던 우리들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여백」에는 나를 품고 낳고 기른 어머니의 아리아처럼 우리가 호명하고 호명되던 대상들이 자취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