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한번 만나고 싶어서.’
여행 중 여유롭게 라테를 들이켜고 있던 J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다. 계절의 변화로 안부를 전하는 것은 진진의 방식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만나고 싶다’는 문장에 J의 눈길이 머물렀다. 고민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J는 아이가 있는 기혼자였고, 한편으로는 그녀도 그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J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며 임신과 육아의 세계가 곧바로 들이닥쳤다. 스물여덟이었다. 뜨거운 사랑과 따가운 이별을 여러 차례 겪던 J는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직장 동료 H를 결혼 상대로 결정했다. ‘사람이 이만하면 됐지. 별게 있겠어?’ 하는 마음이 컸다. 남편으로서의 H는 역시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상대였지만 지독한 개인주의자였다.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시간이 중요한 H 옆에서 J는 지독하게 외로웠다. 하릴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했던 7년의 시간. 특별한 데이트가 아니어도 늘 붙어서 일상을 보내던, 그때는 귀한 줄 몰랐던 진진과의 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초록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J의 등 뒤편으로 식당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햇볕을 온몸에 머금은 채 들어온 진진. 붉어진 얼굴로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는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떨지는 않았을 터. 반면 J는 포커페이스의 대가였다. 진진이 자리에 앉자마자 J는 차분한 표정과 어조로 첫마디를 건넸다.
“왔어? 뭐 먹을래? 여기 메뉴 있어.”
헤어진 지 8년 만이었다. 진진은 얼굴 살이 빠지며 없던 쌍꺼풀 라인이 슬며시 생겨난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사이 J의 왼쪽 어깨에는 잎사귀 모양의 타투가 생겼다. 서로의 모습에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세밀하게 찾아내는 시간.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났다고?’ 하는 생각에 심박수가 하염없이 올라가는 시간. 목이 탔고, 음식이 나왔음에도 둘은 연신 물만 들이켰다.
“왜 보자고 한 거야?”
“늘 한 번쯤은 보고 싶다 생각을 했어. 그런데 네 처지를 아니까 망설여 왔고. 그래서 나도 결혼을 하고서 너를 봐야겠다 생각했는데 그걸 기다리다가는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진진의 진솔한 고백에 J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물컵을 잡는 진진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보았다. 저 손을 오랜만에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J의 머릿속을 스쳤다 사라졌다.
진진은 J에게 고맙다고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수험생 시절에 옆에서 힘이 되어준 것이 두고두고 고마웠다고. 지나고 보니 살아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남들 다 하는 데이트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고 끽해야 신림동 고시촌과 서울대 캠퍼스를 전전했던 것이, 네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고 값싼 돈가스 정식과 수육 백반, 대학교 학식만 주야장천 먹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 너무도 소탈해서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진진의 말을 가만히 듣던 J는 대답했다. 나 역시 행복한 기억이라고. 우리가 한 것이라곤 도서관에서 하루 공부를 마치고 찐 옥수수가 든 검정 봉다리를 흔들며 진진의 옥탑방을 향한 것이 전부였지만, 춥고 더운 옥탑방에서 인간극장을 다운로드해 보던 게 일상이었지만, 크리스마스가 되면 카드의 잔액이 부족해 케이크를 못 사고 돌아 나오곤 했지만, 옥상에 쌓인 눈을 굴려 만든 눈사람을 보며 넌지시 웃던 우리의 모습이 너무도 소탈해서 귀하고 행복했다고.
“특히 우리 처음 데이트했던 홍대에서의 기억은 꽤 특별했지. 브루클린 거리 기억나?”
J가 물었다.
“기억하고 말고.”
“나 그때 기억으로 글도 썼잖아. 반짝이던 우리 모습 남기고 싶더라. 제목은 ‘브루클린’. 그리웠던 건 아니고, 하하.”
보잘것없던 자신과의 순간을 ‘반짝였다’며 글로 남겨주었다는 사실을 들을 때, 하물며 재미삼아 지어 붙였던 길의 별명을 기억할 때, 진진의 눈에 뜨겁고도 반짝이는 무언가가 어렸다. 저것의 의미는 안도일까 그리움일까 아니면.
“그러니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고, 씩씩하게 지내. 나도 진진과의 기억을 보물인 듯 간직하고 살 테니.”
J가 덤덤한 척 말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야.”
둘은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가로수길을 호젓하게 걸었다. 작열하는 한여름이었지만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고 있는 가로수들이 오히려 생명력 있어 보였고, 그 길을 걷고 있는 둘도 오래간만에 생기를 띄었다. 떨어져 있던 공백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으며 ‘우리 키 차이가 이 정도였구나’, ‘길을 생각보다 잘 찾네?’, ‘보폭이 넓고 천천한 걸음을 걷는 사람이었구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곤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따금 씩 10여 년 전 둘만이 주고받던 말투가 튀어나와 우습기도, 당황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걷고 걷다 골목 어귀에 있는 책방을 발견했다.
“청보리 책방. 이름도 예쁘네.”
“들어가볼래? 우리 서로한테 책 골라주기 하자!“
J의 제안에 진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살며시 문을 열었더니 적당한 냉기가 둘을 반겼다. 책꽂이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진진은 헤르만 헤세의 <여름>을 골라 들며 말했다.
“우리 여름 좋아하니까.”
J는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을 건넸다. 진진이 앞으로도 걷는 걸 즐기며 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다. 다정하게 들어와 각자 계산하는 커플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책방 주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둘을 연인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이 J는 싫지 않았다.
책을 그냥 전달하긴 싫었다. 말이든 글이든 의미를 담아 주는 걸 즐기는 J였다. J는 헤어지기 전, 차 보닛에 기대어 책에다 메모를 남겼다.
‘2012 여름 브루클린을 기억하며, 2022 여름 가로수길에서. - J.’
차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이제는 마지막이 될 J의 뒷모습을 진진은 몰래 사진으로 남기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네가 운전하는 걸 다 보네. 멋있다, 야.”
“나 꽤 베스트 드라이버야. 다음에 태워줄까?”
인사가 길어지면 안될 것 같았다. 다시 볼 수 없겠지만 애절해서는 안돼. 짧고, 담백해야지. 손을 가볍게 흔들며 주차장에 진진을 두고 먼저 출발한 J는 사이드미러를 펴며 잠시 생각했다. 오늘만큼은 먼저 그를 보냈어야 했나. 또 나만 등을 보였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골목을 몇 바퀴 돌았다. 겨우 큰길에 들어서자, 신호를 기다리며 횡단보도에 서 있는 진진의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책 한 권 덜렁 들고 있는 그의 실루엣을 가만히 훑게 되었다. 10년 전에도 그랬다. 홍대에서 레모네이드를 두 손에 덜렁 들고 J를 기다리던 그의 모습을 봤을 땐 헛웃음이 새어나왔지. 가을날, 도서관 열람실에서 건넨 쪽지를 읽고 못 견디게 귀엽다는 듯이 웃던 진진의 표정도 떠올랐다. 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새벽 두 시에 샴푸 선물세트를 들고 J의 원룸 앞으로 와 보여주었던 달뜬 표정과, 이별 후 J가 사는 동네에 불쑥 찾아와 하염없이 기다리며 가로등 아래 비치던 어두운 표정 또한 지나갔다.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다. 시선을 거두고 액셀을 밟으려는 그 순간, J의 배에 무언가가 일렁였다. 큰 것 하나가 쑤욱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체한 건가? 더위를 먹은 건가. 얼굴이 망그러지고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줄곧 표정 관리를 잘해오던 그녀, 이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삐이 삐이. 안전띠를 매라는 경고음이 배경처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