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4월, 예정에도 없던 퇴사를 당하게(?)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행이었다. 행선지는 경주와 대구. 그중 대구는 내가 2020년 당시 다녔던 회사에서의 출장 때문에 처음으로 가게 된 곳이었는데, 그 후로 어쩌다 보니 자꾸 생각나는 바람에 작년에도 다녀오고, 이번 해에도 다녀오게 된 것이다. 근데 사실 여행이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현지인처럼 보내는 바람에 잠깐 살다왔다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어디론가 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신나는 단어일지 모르겠으나, 나한테는 '글쎄, 그다지...' 영 흥미가 생기는 키워드는 확실히 아니다. 남들 다 좋아하는 바다도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예전에 부산 놀러 갔을 때도 바다 근처는 무슨 땅만 열심히 밟다 왔음.) 남들이 다 좋아해 미쳐버리는 제주도 또한 서른이 넘도록 한 번을 가보지 않았다. (막상 가게 되면 나는 제주도를 무조건 좋아하게 될 거라는 어떤 확신은 있으나 선뜻 몸과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아 제주도 가는 것을 십 년째 미루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짙은 집순이의 성향과 영역 동물의 강한 습성이 한데 어우러져 '난 여행 별로...'에 큰 몫을 하는 거겠지만, 아무래도 제일 큰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행 자체가 편할 리가 없지 않나. 숙소를 알아보고, 교통수단을 예매하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음식을 꼭 먹어야 하는지, 어떤 곳을 꼭꼭 가봐야 하는지, 또 그날 날씨는 어떤지, 짐은 뭘 챙겨서 가져가야 하는지 등등 신경 쓸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재미나 설렘은 어느 정도 있으나 솔직히 말해서 귀찮다. 너무 귀찮다. 이처럼 나에게 있어 여행은 재밌지만 귀찮고, 설레지만 불편한 일인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나? 여행 안 가면 숙소 뭐하러 알아봐. 교통수단 또한 미리 검색할 필요가 없지. 여기 갈 땐 버스가 편하고, 저기 갈 땐 지하철이 나은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맛집, 카페 이런 것도 미리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내가 자주 가는 단골가게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날 해가 뜨던, 비가 오던, 눈이 내리던 내 일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짐도 가볍다. 가방 안에 핸드폰이랑 지갑, 다이어리 정도만 있으면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대구를 다녀온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어쩌다 보니 자꾸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대구에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고, 숨겨둔 보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자꾸 생각이 났다.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무의식 중에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왜 대구가 계속해서 생각이 났던 걸까? 사실 그 답은 대구를 내려가는 날 짐작하게 되었고, 도착한 다음 날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대구에 그냥 있던 것이 아닌 '살다'왔기 때문이다. 출장 당시엔, 일에 치이고 친한 사람 없이 혼자 생활하는 것이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잘 몰랐지만, 내가 쭉 살던 동네가 아닌 낯 선 곳에서 이틀도 아니고, 2주도 아닌 두 달을 오로지 혼자 머문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대단한 일이다. 특히 나처럼 30년 넘게 가족이랑 단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고, 자주 보진 않더라도 늘 근처에 친구들이 있었던 사람에겐 더욱이 그렇다.
익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은 그런대로 괜찮았고 쓸쓸해도 위험할 것이 없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면서 가볼 일이 전혀 없던 처음 와보는 곳에서 견뎌야 하는 외로움은 절대 괜찮지 않았고 쓸쓸함은 무서울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일상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씻고 출근을 해야 했고, 밥도 챙겨 먹어야 했고, 저녁에 숙소에 돌아오면 설거지도 하고, 청소기도 밀어야 했다. 주말이면 밀린 빨래도 해야 했고, 불쑥불쑥 올라오는 적적함과 외로움에 스스로를 어떻게든 달래서 버려두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살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시점부터 나는 숙소를 집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숙소 주변을 동네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나는 그 순간 '내가 여기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구나'라고 짐작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떤 특정한 것에 나의 정을 붙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떤 장소에, 어떤 음식에, 어떤 환경과 상황에, 어떤 동물과 생물에게 나의 마음을 붙이는 것. 그것이야 말로 삶을 유지시켜주는 일이며, 내 마음의 온기를 옮겨 나누는 일이야말로 삶의 외로움을 덜어내는 방법인 것을 나는 대구라는 동네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퇴근길 걸었던 범어역, 대구은행 역 거리. 그리고 길가에 작게 위치한 만두가게, (그 가게엔 '웃으면 건강할 수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기분이 안 좋으면 꼭 들러 사 먹었던 아이스크림 맛집이 있었고, 수많은 아파트 불빛과 자동차 조명으로 장관을 이뤘던 수성교를 걷는 것 또한 나의 작은 위안 중 하나였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두 번째 골목엔 늘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트리버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강아지 이름을 불러 심드렁한 관심을 받는 것도 그 당시 외로운 나의 소소한 재미였다. 토요일 저녁에 꼭 들렀던 빨래방과 주말 아침이면 오픈하자마자 꼭 갔던 카페, 특정 요일이면 먹었던 카레집에선 시키지도 않은 새우튀김이나 고로케를 하나씩 얹어주는 사장님도 계셨고, 금요일 저녁이 되면 꼭 시켜 먹었던 배달음식점도 있었다. 이 외에도 동네 골목골목에 위치한 가게, 슈퍼, 식당 등등 나는 이 모든 것에 정을 붙이고 내 마음에 담아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오로지 나 혼자 일궈낸 내 삶의 작은 순간이 대구라는 도시의 어떤 동네에 머물러 있다. 생각만 해도 그리움이 가득 해지는 것을 보면 아마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구를 훨씬 더 오래 기억하고, 회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리움이 가득 차는 마음이라니. 앞으로 살면서 나에게 또 그런 순간이 찾아올까 생각하게 된다. 생각만 해도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가득 차는 마음을 다시 가질 수 있을까? 괜한 걱정과 부정적인 마음에 절대라 단언하고 싶지 않고, 오버스러운 마음에 반드시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왠지 나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