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되다
어느덧 6번째 연재네요.
제 생각에는 9회 또는 10회면 소설이 완결날 거 같아요.
그렇게 치면 벌써 절반이나 왔네요. 감회가 새록새록 @.@
첫 장르를 문학으로 맞춰서인지 모르겠지만 글 쓰는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어요 ^^
그럼 오늘도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음...... 음...... 아니야, 아니야."
오래된 마을을 떠나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서있던 곳은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도록 아무것도 없는 초원이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 놀라고 말았다. 이런 허허벌판에 누가 있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바위를 의자 삼아 앉아있는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종이와 연필을 들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나는 조금 거리를 두고 그를 관찰했다. 그는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혼잣말을 하다가 자신이 앉아있던 바위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그 바위를 책상 삼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다시 바위 위로 올라가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바람이...... 그러니까 이 바람이 아니야. 음...... 음......"
그는 계속 중얼거렸다.
"바람? 무슨 바람을 말하는 거야?"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 부는 바람 말이야. 넌 이 바람이 느껴지지 않니?"
"산들바람이 느껴져. 그게 왜?"
그는 잠시 날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너는 시인이 아니구나. 시인은 바람 하나에도 많은 것을 느껴."
"바람 하나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고? 바람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다는 거지?"
"그건 기다려야 알 수 있어. 기다릴수록 더 아름다운 글과 단어가 가슴 속에 떠오르거든."
"그건 시인만 느낄 수 있는 거야?"
"맞아. 시인만 느낄 수 있지. 그리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어."
나는 바람에서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해졌다.
"나에게도 시인이 되는 법을 알려줘."
"시인은 생각이 많은 법이지.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느낄 줄 알아야 된다는 거야."
"느낀다고? 나도 살면서 많은 것을 느껴. 산들바람이 시원하다는 것도 느끼고......"
"맞아. 우리 모두는 다 시인이니까. 하지만 진정한 시인이 되려면 바람이 단순히 시원하다, 매섭다, 차다, 덥다가 아니라 바람을 느낌으로써 삶의 어느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음...... 음......"
"바람에서 삶을 느끼라고?"
"맞아! 바로 그거야."
"바람에서 삶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하는 거지. 아무 생각이나. 그러다 보면 문득 떠오를 거야. 시인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해. 그러니까 내말은, 기다리는 게 그냥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느낌으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느낌으로, 음...... 음......"
"바람을 느끼면서 모든 것을 음미하라고?"
"맞아! 바로 그거야. 바람에도 여러 가지가 있거든."
나는 시인의 말이 석연치 않았지만 일단 그의 말을 따라가만히 기다려보기로 했다.
바람이 불었다 멈추었다.
다시 살랑거린다. 그리고 고요해진다.
다시 불기를 반복한다.하지만 같은 세기는 아니다.
어느 날은 거센 바람이 불어와 따뜻한 집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다 다시 바람이 잔잔해지면 그 전에는 못 느끼던 잔잔한 바람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바람을 느끼는데 오랜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시인의 말대로 바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네 말대로 바람은 많은 것을 담고 있나 봐. 많은 생각이 나에게 떠올랐어. 이제 난 시인이 된 거야?"
"아직 아니야. 네가 느끼고 생각한 걸 글로 써봐. 되도록이면 짧게. 너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단어를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거야. 그 속에 네가 얻은 걸 담아내면 그 때 넌 시인이 되는 거야."
바람에서 느낀 걸 글로 담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 느낌을 어떻게 글로 표현한담. 처음에는 주저리주저리 글을 썼다.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글은 내 마음을 충분히 묘사해주지 못했다. 중간중간 떠오르는 단어를 옆에 적어놓았다. 그리고 좀 더 나은 단어의 흐름을 찾아 계속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음...... 이 단어가 아니야......"
나는 어느새 시인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중얼거리기를 한참, 나의 첫 시가 완성되었다.
바람
산들바람이 기분 좋은 이유는
나의 마음을 녹여주기 때문에
겨울바람이 매서운 이유는
나의 연약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바람의 변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기 때문에
고요한 바람이 위대한 이유는
나를 숨쉬게 해주기 때문에
바람 따라 살아간다
나는 시인에게 아직 가다듬고 싶은 부분이 많다고 했다. 고치고 싶은데 딱히 대체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가다듬으려면 기다려야 해. 여태 했던 데로 말이야.”
시인이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생각하고 기다리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오겠지.
시인은 내 시가 좋은 시라고 칭찬했다.
“솔직하고 투명한 것보다 좋은 시는 없지.”
나는 시인과 함께 하며 시를 쓰는 기쁨을 어렴풋이 느꼈다. 이것이 예술혼일까? 시를 쓴 대가로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나는 왜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 느낌을 받을까?
나는 마음에 찾아온 변화를 감지하며 지평선의 끝을 향해걷기 시작했다.
드넓은 대지를 걷다 보면 지평선이 수평선으로 바뀌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바다를 기대하며 걷고 있었다. 그리고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을 즈음, 나는 해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을 밟아보았다. 이 곳에서는 신발이 거추장스러웠다.
나는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둘은 같은 색이었지만 다른 색이었다. 둘의 만남은 아름다웠다. 해변은 고요했고 파도 치는 소리와 모래알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공기를 메웠다.
나는 해변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왠지 하루 종일 이 곳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날이었다.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던 나는 어느 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을까.
광장. 이야기꾼. 색깔이 많은 마을. 일곱 가지 파란색으로 빛나던 호수. 산 중턱의 작은 마을과 그 곳에 있던 어여쁜 꽃. 숲 속의 팻말. 현자의 마을. 큰 바위 이야기.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나는 문득 큰 바위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여기저기 부딪히며 굴러 내려갔을 테니 여기저기 깎여져 조금 작아졌을지도 몰라. 얼마나 작아졌을까? 그의 파편 중에 여기 이 해변의 모래알만큼 작아진 것도 있겠지? 아니면 그를 이루던 모든 부분이 다 이렇게 작아졌을 수도 있겠구나. 큰 바위로 남아있었다면 누군가 그를 기억할텐데 이렇게 작은 모래알은 누가 기억해주지? 너무 작아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구나. 물론 모여있을 땐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을 이루기도 하지만…… 단 하나의 모래알은 무슨 의미가 있지? 바위는 왜 작아지는 길을 선택한 걸까?'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깨고 끼어들었다.
“안녕.”
나는 고개를 휙 돌아보았다. 해변에는 어떤 소녀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왠지 그녀가 목소리의 주인공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갸우뚱해하며 다시 수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분명히 들었는데……’
그 때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이번에는 확실하게 들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주변에는 아까 그 소녀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해변의 모래알을 만지작거리다 나는 나에게 말을 건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래알이었다.
"안녕. 드디어 날 찾았구나."
"안녕. 너였구나."
나는 모래알에게 속삭였다. 사실 모래알은 너무 작아 정확히 어느 모래알과 대화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대강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대답했다.
"어떻게 너와 대화할 수 있지? 나는 너의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는 거지?"
내가 물었다.
"그건 아마도 네가 나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네가 나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일거야."
모래알이 대답했다.
"맞아. 나는 모래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큰 바위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크고 위엄 있던 그리고 홀로 서있던 바위 말이야. 근데 그 바위는 작아지고 싶어했어. 그래서 지금쯤 아마 모래알만큼 작아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일리 있는 생각이야. 이 곳에는 기억이 나지 않을 때부터 모래알이었던 모래알도 있고 처음에는 큰 바위였다가 점점 작아져서 모래알이 된 모래알도 있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기 어딘가에 있을 수도있지.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우리는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면서 어디로든 갈 수 있거든.”
"그거 참 대단하다."
나는 해변을 바라보면 말을 덧붙였다.
"너희 하나하나는 참 작고 자세히 보면 모양도 제각각, 울퉁불퉁한데 다같이 해변을 채우고 있으니 아주 근사하구나.”
"맞아. 우리 하나하나는 별 의미가 없어. 하지만 우리 하나 하나는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지. 하나의 모래알이 된 이상 과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가 다 같이 살아가야 진정 존재하게 된다는 거지. 함께라야이 곳처럼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만들 수 있거든. 우리는 이렇게 서로 부딪히며 살아갈 때 의미가 있어."
나는 모래알의 이야기가 심오하다고 생각했다. 모래알 하나는 의미가 없지만 모여있어야 의미 있고 아름답다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마 그것이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기 때문일까.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던 또는 얼마나 끔찍하던 간에 내가 혼자 홀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철저히 혼자임을 느끼고있었다. 그리고 혼자라는 사실은 나의 존재 자체, 나의 존재의 의미를 흐리게 하고 있었다.
‘내 옆에 있어줄 모래알이 필요해.’
나는 해변을 채우고 있는 이들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