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모습을 기억한다는 건
오늘도 글 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데이지가 소개시켜준 사람은 이 마을의 스타였다.
그는 너무나 유명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를 알았다. 길거리에는 그의 초상화가 흔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사람들의 입에서는 툭하면 그의 노래가 하루의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왔다.
이 마을에서는 그를 아는 것보다 그를 모르면서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나도 데이지가 그를 소개시켜주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길거리의 초상화와 사람들의 흥얼거림을 통해.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다.
그는 불공평한 나라로 치면 그는 최고의 등급에 속한 자였다. 그는 수준 높은 예술가였고, 부유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좋아했다. 그는 높은 가치를 지닌 사람이었다. 불공평한 나라의 가치관 속에서는 사람들이 그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고자 앞다투었을 것이고 그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자랑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곳은 공평한 나라였다. 이 곳에선 스타의 계급이 등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곳은 사람을 찍어내듯 등급을 나누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한 생명을 지닌 한 사람으로 대했다.
그 말은 내가 스타와 알고 지낸다고 해서 내 삶의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켰다. 나는 여전히 데이지의 아늑하고 작은 집에서 지냈고, 그녀의 거실 소파를 침대로 사용했으며, 여전히 그녀의 옷을 뒤져입었고 - 우리는 몸집이 비슷했다 -, 대부분의 시간 꽃이 만개한 정원을 산책했으며, 저녁이 되면 맛있는 요리를 함께 먹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일상은 여전했다. 나는 스타에게서 어떠한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새 나는 이 곳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정원을 거닐던 날이었다. 홀로 고즈넉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던 나는 마찬가지로 혼자 걷고 있던 스타와 우연히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도 나에게 답했다.
“좋은 아침. 오늘은 웬일로 혼자 있구나.”
“가끔은 혼자 산책하곤 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걸어도 될까?”
그는 고개를 옆으로 한번 튕기며 함께 걸어도 될지 물었다.
“좋아요.”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산책이란 시간을 많이 쏟을수록 생각이 많아지게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이 정리되게도 한다. 스타와 나는 산책을 하며 긴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데이지가 왜 그가 나와 닮았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스타는 화려하지만 그의 과거는 생각보다 초라하고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는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그를 스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의 노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지속될수록, 그리고더 가난해질수록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그는 도움을 받을 때마다 답례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의 감사의 마음은 노래를 통해서 전해졌고 어느새 한 명씩, 두 명씩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도움을 받은 만큼 그리고 그것을 노래로 보답한 만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다.
그는 회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든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단다. 거대한 문이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그 문은 아주 단단하고 거대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게 되는 때가 있단다. 대게 큰 문이 열리지 않는 이유는 작은 자물쇠 때문이라는 걸. 내가 보답의 노래란 열쇠로 그 자물쇠를 열었다는 걸.”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문을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자물쇠가 열린 다음이란다. 문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게 되더라도 문 앞에 가로막혀 있던 그 시간을 잊지 말아야 해. 자신의 바닥을 기억해야 하지. 왜냐면 그 순간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시간이거든. 그 때를 기억해야만 다른 사람을 위로해줄 능력이 생긴단다. 내가 겪은 아픔, 슬픔, 고통만큼 다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기억에서 인생의 여러 순간들을 지워버려. 중요한 것들도 예외는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해. 문 앞에 가로막혀 있던 그 순간을 기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을거야.”
그의 말에는 왠지 모를 힘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그의 정신이 고결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가 해준 말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인생에서 힘든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그 말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약자가될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지금 당장은 높은 곳에 있더라도 발을 헛디뎌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는거니까. 사실 높은 곳일수록 발 디딜 곳이 없으니 미끄러지기가 더 쉽겠구나. 그런 의미에서 높은 곳에 있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고. 우리 모두는 그저 한 때 약자였거나, 지금 약자이거나, 혹은 미래에 약자가 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니까.’
나는 생각에 잠겨있다 문득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우리는 누구나 문 앞에 가로막히는 순간이 있다고 했죠. 겨우 힘들게 문을 열고 지금의 위치까지 왔는데 다시 거대한 문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건가요? 제 말은 여태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스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겠구나. 한 평생 빚어온 그릇이 깨진다는 건 견딜 수 없이 힘든 일이겠지. 그 그릇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더욱. 하지만 무너진 그 자리에서 다시 그릇을 빚기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른이 되는 일과 같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일 거야.”
나는 또 물었다.
“일어날 힘이 없다면요?”
“일어날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근본적인 것을 기억하느냐에 달렸단다. 나는 본디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지. 스타이기 이전에 말이야.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좀 더 근본적으로 알려주는 요소란다. 스타라는 타이틀은 무너질 수 있어도 내가 노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무너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지.”
그는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결 같을 수 있는 것에 시간을 들여야 한단다. 진정 오랫동안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것에 말이야. 한결같음의 힘은 조용하고 잔잔하게 다가오지만 무시할 수는 없단다. 그것은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아.”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게서 마치 빛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는 실제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스타라서가 아니라 그의 내면이 선하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떠난 뒤로 나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걸을 수 있는 길에게서, 바라볼 수 있는 하늘에게서 감사함을 느꼈다.그리고 낮에는 정원을, 밤에는 하늘을 찾았다.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들임으로써 내 안을 조금씩 행복으로 채웠다.
낮의 정원은 꽃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다. 그리고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장소다. 나는 내가 이것저것 생각하길좋아한다는 것을 여행을 떠나 많이 걷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모르던 나의 발견…… 그것은 이상하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늘을 좋아하는 이유는 색의 변화가 신비로워서다. 나는 특히 밤하늘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파란 하늘이 지나가고 어둠이 찾아오면 숨겨져 있던 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고향에도 별이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 고향의 밤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것들에 별빛이 가리워졌을지도 몰랐다. 내 기억 속에는 가로등이 비춘 환한 밤거리만 있을 뿐이었다. 밤하늘의 별은 내 안에 없었다.
이곳의 밤은 아주 어두웠다. 덕분에 나는 별을 더 잘 볼 수 있었고 밤하늘의 별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종종 별을 바라보다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것은 별이 마치 밤에만 볼 수 있는 보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별의 신비로운 매력에 빠진 내 곁에는 항상 데이지가 있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함께 바라보았다.
어느 날 데이지는 별을 좋아하는 날 위해 그녀만의 숨겨놓은 보물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나의 손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곳은 언덕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이 있는 곳이었다. 마을에서 벗어나 빛도 소리도 없는 언덕. 드러누워 별을 바라보기에 최고인 잔디. 별 사이에 깃든 노래를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고요함.
그녀의 선물은 별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비밀의 장소였다. 그리고 이 곳은 우리만의 장소가 되었다.
어느 날 나는 언덕을 찾았고 데이지는 이미 그 곳에 와있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소리 없는 침묵과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도 대화할수 있게 된 걸까?
나는 우리가 만나기 전 이 곳에 혼자 왔을 그녀를 상상해 보았다. 지금 이 배경에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일 것 같았다.
그 때 그녀가 입을 열고 나에게 질문은 던졌다.
“너는 밤하늘이 왜 좋아?”
갑작스런 질문 같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대답했다.
“해가 지고 밤하늘이 등장하면 하늘에 숨겨져 있던 별들이 나타나잖아. 밝을 땐 보지 못하지만 어둠이 찾아오면 모습을 드러내는 별들이 좋아.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진짜 보물같거든. 그런 별들을 보고 있자면 나는 시인이 되기도 하고 철학자가 되기도 해. 눈을 감고 별을 감상하다 별이 보고 싶어 다시 눈을 뜨고. 그러는 동안 내 안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 여러 생각이 꽃을 피우고. 내 눈에는 별빛의 연주가 보이고, 내 귀에는 별빛의 연주가 들리고.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별빛의 연주가 좋아. 이 소리 없는 연주는 그 어떤 화려한 음악보다 더 강하고 잔잔하게 내 마음을 울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좋은 음악이 많잖아. 그런데 대부분은 듣다 보면 실증이 나버려. 하지만 정말 좋은 노래는 들으면 들을수록 더 듣고 싶은 노래가 아닐까 싶어. 시간에 깎여 사라지는 노래가 아닌, 시간에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그런 노래. 별빛의 연주가 나에게는 그런 노래야.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황홀해지는 연주.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연주.”
데이지는 나의 대답에 가만히 있었다. 왠지 그녀의 눈빛이 조금 슬퍼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네가 밤하늘을 좋아하는 이유는 뭐야?”
그녀가 입을 떼었다.
“나도 너와 같아. 별이 보고 싶어서. 근데 나에게 별은 죽음과 같아. 별은 나를 슬프게 하면서 동시에 행복하게 하는 존재야. 그건 나의 소중한 사람들 때문이야. 오래 전 저 멀리 떠나버린…… 왠지 그들이 저 별 중의 하나가 되어있을 것만 같아. 난 어릴 적에 별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와 더 가까워진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래서 별을 바라보는 게 좋은가 봐.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저 별 중의 하나도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으니까.”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별 자체가 아닌 별빛뿐이듯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에 짙어지는 건 그들이 남긴 사랑과 희생뿐이야. 그 외의 덜 중요한 것들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져 가.”
그녀는 말을 멈췄고, 나는 그녀의 잔향을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침묵을 공유했다.
별빛. 그것은 나에게 연주였고, 그것은 그녀에게 사랑과 희생이었다.
- 9화(마지막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