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크랜디아 Oct 29. 2022

강제로 미니멀리스트

Part2. 캠핑카에 살기로 결심했다 - 4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내가 들고 온 짐은 조금 큰 사이즈의 여행가방 두 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와이안 항공을 타고 왔는데, 무료 수화물이 2개까지였다. 그냥 거기에 맞춰서 짐을 쌌다. 평생 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이민가방 여러 개에 바리바리 싸 갈 이유도 없었고,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현지에서 조달해 쓰자 싶었다. 쇼핑의 천국 미국에서 신나게 쇼핑할 수 있는 명분이자 면죄부였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유학생에서 이민자로, 2인 가족에서 3인 가족으로 굽이치며 흘러가는 인생의 큰 변곡점을 몇 차례 지나는 동안  집은 조금씩 넓어졌고, 집 안의 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공부만 끝나면 한국에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첫 2년 동안 새로 산 가구라고는 둘이 누우면 붙어서 잘 수밖에 없는, 그래서 신혼부부만 쓸 수 있다는 작은 침대와 손님이 올 때 침대로 바꿀 수 있긴 하지만 평상시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소파 딱 두 개뿐이었다. 식탁은 중고 이케아 책상을 15불에 구입해서 사용했으며, 티브이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궁색하기 그지없는 신혼살림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우린 곧 돌아갈 사람들이란 기본 전제 덕분에 우리 집에 들어오려는 물건들은 늘 엄격한 입주 테스트를 거쳐야만 했다. 

미니멀리즘이 유행하기도 전이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강렬한 동기나 목적 따위 없이도 절로 그렇게 살아지던 시절이었다.


이 굳건한 성역이 깨진 시발점은 2018년 가을이었다. 방 1개짜리 집에서 2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넓어진 집에 단출한 가구들이 조금은 휑해 보였고, 아이가 태어나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미국에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도 있겠다는 계산까지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왔다. 그것도 '사면 살 수록 남는 장사'라며, 아무것도 안 사는 우리를 바보 천치 취급하는 쇼핑의 천국,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와 함께 말이다. 

마침 우리에게 티브이가 없는 게 아닌가? 없는 걸 사는 건 낭비가 아니라 백 퍼센트 필요에 의한 합리적인 소비라고 서로를 부추기며, 새 집의 거실 한쪽 벽을 꽉 채우는 65인치 티브이는 까다로운 입주 테스트를 우습게 통과했다. 하지만 아직 미니멀리스트의 성역이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었다. 언제든 떠나게 되면 돼 팔 생각으로 어른 키만 한 티브이 박스를 버리지 았았기 때문이다.


다음 집으로 이사하며 거의 2년 가까이를 창고 구석자리를 차지하던 이 티브이 박스는 결국 버려졌다. 그 사이 미국에 더 이상 유학생이 아닌 이민자로 꽤나 장기간 살게 될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우리의 짐을 감당해줄 넓디넓은 차고가 생겼다. 

모든 고삐는 풀려버렸다. 입주 테스트는 변질되었다. 

어떤 물건이 우리 집에 들어올 때마다 "이 물건이 왜 필요한가?"를 물었다면 이제는 어떤 물건을 갖고 싶거나, 가질 기회가 생겼을 때마다 "이 물건이 언젠가는 필요할 것인가?"를 묻게 되었다. 이건 뭐, 대규모 미달사태로 인해 뽑기로 작정하고 묻는 입사 면접 질문인 "뽑아주면 열심히 할 텐가?"와 동급이라 여기에 "아니요"란 대답이 나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세상의 모든 물건은 쓰임이 있어 만들어진 것이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그 물건이 필요할 때가 당연히 있지 않겠는가?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 간 집 안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차고에만 머문 수많은 물건들을 나열해보니, 자전거 3대, 씽씽이 4대(왜 사람은 셋인데 킥보드는 4대나 될까) 텐트 2개, 카약 2개, 캠핑체어 6개, 마당 있는 집에서만 쓴다는 나뭇잎을 바람으로 날려주는 강풍기까지... 끝도 없이 짐이 쏟아져 나왔다. 집 밖이 이러한데 집 안의 상황은 말해 무엇하리. 

우리는 지인들 사이에서 피닉스 만물상으로 불렸다. 없는 것만 빼고 다 있다는 그 집으로. 

캠핑카에 살기로 결정한 이상, 모든 짐을 정리해야만 했다.


차 두 대가 넉넉히 들어가는 차고는 캠핑 트레일러와 잡동사니 짐들에 잠식당한 지 오래였다.


짐을 정리하는 과정은 그동안 해 온 보통의 이삿짐 정리와는 달랐고 훨씬 난도 높은 작업이었다.

우리는 캠핑카에 얼마큼 살기로 기한을 정해놓고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길 위의 삶이 얼마나 우리에게 잘 맞는지에 따라 생각보다 캠핑카 생활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고, 또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회와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다시 기존의 ‘집’이라는 주거공간으로 돌아올 옵션도 활짝 열려있었다. 

그렇기에 당장 쓰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모든 짐을 다 내다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결과 짐들을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정리하기로 했다.


1. 캠핑카로 갈 짐 2. 나누거나 버릴 짐 3. 스토리지로 보낼 짐


제일 먼저 캠핑카에 가져갈 짐들을 추려보았다. 캠핑카는 어려 모로 집과 다르지만, 무엇보다 수납공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옷장으로 쓸 만한 곳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찬장 같은 공간뿐이었고, 심지어 이 좁은 공간을 세 식구가 나눠 써야만 했다.

옷 정리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옷은 옷방 문 밖까지 넘실댈 정도로 차고 넘치는데 정작 손이 가는 옷은 몇 벌 없다. 그렇기에 이 작업은 세 카테고리 중 '난이도 하'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요즘 내가 가장 즐겨 입는 옷 중에서 편하게 휘뚜루마뚜루  입을 수 있는 옷을 고르면 되기 때문이다. 

캠핑카 생활을 하게 되면 직장에 나갈 일도, 친구를 만날 일도, 격식 있게 차려입어야 하는 일도 별로 없을 예정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벼운 원피스 하나를 넣은 것 말고는 모두 일주일에 한 번은 꺼내 입는 옷들로 골랐다. 

남편은 스티븐 잡스처럼 모든 옷이 검정 또는 회색이었기에 옷을 고르는 과정에 고민 따위는 없어 보였고, 가장 어려운 것은 아이 옷을 고르는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4살 특성상 지금 입지 않으면 내년에는 맞는다는 장담을 할 수 없는 옷들이 너무나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결국 내 옷 몇 벌을 더 빼고 아이 옷을 좀 더 챙겨 넣었다.


두 번째 카테고리인 버리거나 주변에 나눔 할 짐을 정리하는 과정은 '난이도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쁜 쓰레기(?)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 나는 작고 귀여운 혹은 크지만 사랑스러운 장식품들을 집 안 곳곳에 놓아두곤 했다. 남편이 아무리 타박해도 오랜 시간 꿋꿋하게 지켜왔던 예쁜 쓰레기 사랑은 캠핑카로 이사 갈 준비를 시작하며, 놀랍게도 단번에 정리가 되었다. 걔 중 수납용으로 쓸 수 있는 깨지지 않을 만한 물건들을 빼고는 모두 나눔을 했다. 

미국에서는 이사를 할 때 야드 세일 혹은 가라지 세일이란 걸 한다. 정리할 물건들을 마당 혹은 창고에 늘어놓고 아주 싼 가격에 팔고, 남는 물건들은 중고가게에 기부를 하는 식이다. 2022년 포스트 팬더믹 시대에 맞게 우리는 대면 가라지 세일 대신 일부 물건들은 미국의 당근 마켓인 Offer Up에 올려 팔았고, 대다수의 물건들은 지인을 대상으로 오픈 챗을 만들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눔 했다. 물론 그러고도 남는 물건들은 Good Will에 기부하는 걸로 짐 정리를 마무리했다. 

버리는 물건 없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물건을 넘겨주고, 새롭게 쓰임을 얻은 물건들을 보는 일은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물건을 사서 채우는 것만 좋은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나눠주고 비우는 것 또한 그에 버금가는 기쁨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과정은 바로 창고에 당분간 보관할 짐을 추리는 일이었다. 당장 쓸 짐인 캠핑카로 보낼 짐을 정리하는 일과 앞으로 필요하지 않을 짐들을 비우는 일은 비교적 명확하게 나눠졌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결정은 지금 당장은 쓰지 않지만 언젠가 집으로 이사 가게 되면 다시 필요할 것만 같은 물건들을 '현명하게' 추려내는 것이었다.

몽땅 내다 버릴까 싶다가도, 그러면 또 나중에 새로 사야 할 것만 같아 아까운 마음이 들고, 필요 없는 것 같다가도 언젠가 한 번씩 요긴하게 썼던 기억이 나 다시 담 아들 고의 반복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창고에는 꽤나 많은 짐들이 보내졌다. 완전히 보내주기에는 아직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이번 짐 정리를 하며 예쁜 쓰레기들에 대한 나의 오랜 사랑을 단칼이 정리된 것처럼, 아직은 끼고돌고만 싶은 이 물건들과도 쿨하게 작별할 날이 언젠가 별안간 오는 날도 있겠지 생각하며,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를 창고의 문을 굳게 닫았다. 

몇 달 후가 될지 모르지만 이 문을 다시 열 때에는 내 삶도, 내 마음도, 내 안의 욕심도 조금은 더 단순해지고 단출해지기를 바라며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미니멀한 삶을 살게 된 계기를 돌이켜보니, 그곳에는 언제나 '제약'이 있었다. 미국에 평생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시간의 제약' 이 첫 집에서 있었고, 지금 캠핑카에서의 삶에는 '공간의 제약'이 존재한다.

내 삶에 제약이 있다는 사실은 종종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딘가 불안정한 삶이라는 느낌, 내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들곤 했다. 하지만 그 제약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미니멀하게 살게 되었던 그 시기에  우리는 가장 많이 걷고, 가장 많이 보고, 가장 많이 이야기하며 빈 공간과 빈 시간을 채우곤 했다.

생각해보니 정작 미니멀리스트를 소망하던 때의 우리는 어느 때보다 물건을 많이 소유했고, 그 물건들을 사고, 정리하고 관리하느라 늘어나는 물건 개수만큼 줄어드는 시간에 쫓겼다. 극강의 맥시멀 리스트로 살던 시절에는 오래간만에 온 가족 모두 시간이 나는 날을  장보기, 청소, 빨래, 차고 정리로 보내곤 했다. 물건을 쟁이고, 그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고, 결국에는 지쳐서 코스트코에서 사 온 치즈피자 한쪽을 먹으며 피곤한 채로 마무리하는 그런 하루 말이다.


의도치 않은 미니멀리스트로 살던 첫 집에서는 여유시간이 나면 남편과 둘이 산책을 하거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고, 그리운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곤 했다. 

캠핑카에 살며 반강제로 미니멀리즘을 실천 중인 지금은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하고, 냉장고가 작은 덕에 장을 좀 자주 보긴 하지만 넣을 수 있을 만큼만 사야 하기에 장 보는데 드는 시간이 짧다. 청소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캠핑카 정리를 매일 5분 정도씩 한다. 물건 놓을 곳이 부족하기에 온라인 쇼핑몰을 들여다보다가 그저 예뻐서, 갖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충동구매를 하지도 않는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많아지자 시간이 남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시간에는 밀린 옷장 정리나 차고 정리 대신 아이와 산책을 가고, 남편과 캠핑카 뒤의 데크를 활짝 열어두고 시원한 바람에 맥주를 곁들여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일요일, 짜파게티에 맥주는 국 룰 


돌이켜보니 ‘제약’은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그때는 그걸 알지 못하고 제약이 없는 삶을 가지게 될 날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제약이 없어지자마자 무섭게 물건을 사들인 것은 집을 채우기 위해서였을까,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였을까? 

6년 만에 물건으로 가득 차 있던 집을 비우자,  물건들 대신 집 안에 좀 더 담았어야 했던 소중한 일상들이 보였다.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던 집을 떠나  불안정한 삶이라는 불안함과 남보다 덜 가진 것 같은 열등감을 마음에서 덜어내기 시작하자,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제약'이라는 축복을 편안한 마음으로 온전히 누려보고 싶어졌다.

 





이전 06화 절대 캠핑카를 찾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