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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Oct 29. 2022

쓸고 닦고 조이며 내 손길 담기

Part 3. 슬기로운 집 없는 생활 - 1

캠핑카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 주인아주머니의 이혼 소송이 마무리되는 동안 피닉스에서 한 시간 거리의 시골 언덕에 서서 1년 넘게 방치되었던 트레일러를 끌고 왔다.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 기본적인 전기 연결 등은 확인했지만 그 외의 모든 시스템들이 문제없이 작동하는지 확인해보니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가벼운 팝업 트레일러만 토잉 하다가 그보다 3배는 무거워진 트레일러를 우리 트럭이 잘 끌 수 있을까도 고민되었다.

뭐든 안전이 최고라는 신념 하에, 바로 길을 떠나기로 한 일정을 조금 변경해 한 시간 거리 안에 있는 가까운 캠핑장에서 정비의 시간을 이틀 정도 가지기로 하였다.


8월의 애리조나는 평균기온은 화씨 105도, 섭씨로는 40도에 육박한다. 이곳에서 맞는 6번째 여름이니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정말 더위에는 장사 없다. 

누군가가 이 더위에 그럭저럭 적응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더위 자체에 적응했음이 아니라, 한여름 넉 달 정도는 실내에서 에어컨만 쐬고 사는 삶을 그럭저럭 받아들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높은 온도와 사막 특유의 건조함이 만나 나는 여름에는 현관문을 여는 순간 건식 사우나를 만날 수 있고, 그 열기는 밤 열 시까지도 이어진다.

야외활동이 생명의 위협이 되는 피닉스의 여름마다 마음에는 우울감이 얕게 덮어지곤 했다. 

어디로든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잠시라도 걸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지만, 성공적인 캠핑카 입주를 위해 자체 점검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다.


피닉스의 여름은 더위 덕분에 모든 것이 비수기이기 때문에 다행히도 가고 싶었던 캠핑장을 예약할 수 있었다. 우리가 7년 전 결혼식 청첩장에 들어갈 사진을 찍었던 Lake pleasant 캠핑장에서 피닉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 정도의 의미부여라면 이틀의 찜통더위쯤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애리조나의 노을은 영원히 그리울 것 같다. @ LAKE PLEASANT STATE PARK, AZ


미국의 캠핑장을 예약할 때는 Full Hook up이란 문구를 볼 수 있다. 집같이 편안한 RV여행을 만들어주는 필수템인데, 여기서 Full의 의미는 전기와 상하수도를 모두 연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Water/Electricity Only라고 하면 전기랑 물은 연결할 수 있지만 오물은 처리할 수 없다는 얘기, Dry camping only이면 아무것도 연결할 수 없는 텐트사이트를 얘기한다.

몇 년 전 재미있게 봤던 핑클의 캠핑 클럽이란 프로그램에서 캠핑카에 있는 휴대용 변기를 비우다가 오물이 튀는 장면을 봤는데, Full hookup과 함께라면 그런 참사를 피할 수가 있다. 우리는 모든 훅업이 잘 작동되는지를 확인해야 했기에 Full hookup 사이트를 예약했고 미리 준비해둔 연결선을 하나하나 세팅해보았다.


"일단 너무 더우니까 빨리 전기 연결해서 에어컨부터 틀자!"

"당연한 소리! 어 이게 왜 안 들어가지.."


전기코드를 꽂는 시작부터 불안한 기운이 엄습한다. 나름의 철두철미함으로 사전조사를 충분히 하고 필요한 기본 아이템들을 아마존에서 주문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전기를 연결하는 선을 잘못 산 것이었다. 

RV의 전기 연결 아답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돼지코 모양, 다른 하나는 돼지코를 45도 각도로 트위스트 해놓은 모양이다. 실제로 대다수 RV가 일반 돼지코 모양을 쓰기에 우리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주문을 했는데, 우리 캠핑카는 트위스트를 쓰는 모델이었던 것이었다.

몰라서 그런 걸 누굴 탓하랴, 일단 문제는 발생했고 우리는 전기 없이 40도 불볕더위에 냉방이 안 되는 트레일러에서 자게 생겼다. 

그런 일은 절대 피해야지라는 일념으로 주변의 대형마트, 캠핑용품 전문점등을 돌았지만, 돼지코만 있고 트위스트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부랴부랴 아마존으로 다음날 도착하는 것으로 주문을 넣었지만 당장 오늘 밤이 문제였다. 


불행 중 그나마 희소식이라면 우리는 원래 살던 집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캠핑장에 있었고, 근방에는 재워줄 친구들이 포진해있었다. 호기롭게 오늘이 우리의 캠핑카 생활 1일 차라고 말한 것이 다소 무안했지만, 온몸의 땀구멍이 다 열리는 더위를 무안함 따위가 이길 수는 없었다.


"어서 와.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을게!"


첫날밤 고군분투를 마치고 패전한 뒤 땀에 절은 몸으로 친구 집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였다. 널찍한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와 뽀송한 상태가 되자 몸과 마음이 나른해졌다. 얼음을 잔뜩 넣은 물을 들이켜니 정신이 번쩍 든다. 

불과 며칠 전까지 나도 이런 곳에 살았는데, 이제는 양팔을 쭉 펴기도 어려운 작은 욕실에서, 얼음이 나오기는커녕 오늘 장 본 게 음식들이 다 들어갈까를 걱정해야 하는 작은 냉장고에, 심지어 전기까지 걱정해야 하는 곳에 살게 되다니... 설렘은 사그라들고 걱정은 몸집을 키워갔다. 


이미 저질러놓고, 이 결정이 잘한 것일까, 정말 길 위에서 좋은 추억들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하나마나한 고민을 털어놓는 나에게 그날 밤 친구가 얘기했다.


"오늘은 액땜 같은 거야. 이제 액땜했으니 다 잘 될 거야!" 


크리스천으로서 액땜 같은 것을 믿어야 하는지 좀 고민이 되었지만, 다 잘될 거라는 말은 언제나 위로가 되었다. 

'그래 다 잘 될 거야. 내일부터는 진짜 시작이야.' 하고 자기 최면을 걸며 새삼 에어컨이라는 현대문명의 소중함에 감사하며 캠핑카 생활 첫 번째 밤이 지나갔다.


주문 같았던 자기 최면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인생이 언제나 그렇듯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든 일이 다 잘 돌아가는 일은 역시나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마존 배송이 지연되면서 우리는 하루 더 전기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찌어찌 전기가 해결되니 알 수 없는 곳에서 물이 줄줄 새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다 뜯어보고 난리 한 바탕을 친 뒤 온수히터에 작은 균열이 생겼고 그곳으로 물이 새는 것을 찾아냈다. 당분간 온수 없는 생활을 해야 했지만, 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무더위 덕분에 냉수도 온수 같다는 점이었다. 따가운 해를 좀 가리려고 어닝을 폈지만 어닝에는 곰팡이가 그득했고, 거실의 가장 큰 창문 블라인드는 고장이 나서 올라가지가 않았다. 에너지 넘치는 아이가 뛸 때마다 바닥에서 나는 끽끽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진짜 시작'이라는 말은 맞았다. 

길을 떠나자마자 날씨도 우리 편, 하는 것마다 즐겁고, 가는 곳마다 완벽하고, 캠핑카 생활이 안락하기 그지없을 거라는 생각은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나 가능한 바람일 뿐이었다. 

캠핑카 생활을 불편할 때가 많았고, 고칠 것은 천지였고, 트레일러를 끌고 하는 장거리 운전은 평소 운전보다 열 배쯤 스트레스였으며, 새로운 도시는 낯설고, 사진 상으로는 완벽했던 캠핑장은 구리기 일쑤였다. 

이 모든 게 새롭게 선택한 길 위에서의 삶의 일부였고, 에어컨 없는 첫날은 나의 자기중심적 환상의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완벽한 시작이었다.


이틀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Lake Pleasant 캠핑장에서의 일정은 이틀 더 늘어났다. 급한 것들을 손보고 짐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다 보니 그것도 부족했다. 하지만 완벽한 상태로 출발하려고 한다면 이 여름이 가기 전에 피닉스를 떠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우리는 애리조나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뉴멕시코로 향했다.


떠나기 전 사람들에게 "이제는 집 없는 홈리스예요"라고 얘기하곤 했다. 

실없는 농담 인양 던진 말이지만, 그 안에는 생애 처음 해보는 '집 없는 생활'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묵직하게 담겨있었다. 

하지만 막상 길을 떠나보니 분명해졌다. 쓸고 닦고 조이며 내 손길을 담은 공간은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집이 되었다. 

예전에 집에 살던 시절 가장 싫었던 일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언제나 무질서함으로 향하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끝이 없는 가사노동이었다. 뒤돌아서면 어지럽혀져 있는 옷을 정리하는 일, 차고를 정리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일상의 흔적과 함께 금세 무질서로 원상 복귀하는 넘쳐흐르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들은 삶에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어떤 면으로도 즐겁거나 생산적이지 못했다.


캠핑카 차고에 달린 뒷문에 튼튼한 와이어를 연결하자 제법 그럴싸한 야외데크가 되었다.


캠핑카의 공간은 이전에 살던 집의 4분의 1 크기로 줄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을 관리하고 가꾸는 수고로움까지 동시에 4분의 1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수고스러움이었다. 

이전의 집안일이 물건에 압도당할 때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하는 정리와 청소의 개념이었다면, 지금의 집안일은 정말 집을 집답게 가꾸며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 되었다. 

쓸고 닦고 조이며 집을 집답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수고롭지 않다고 할 순 없지만, 그 과정의 끝에는 언제나 허무함보다는 뿌듯함이 함께 했다. 


피닉스를 떠날 때는 여름의 한가운데였는데 어느덧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계절이 찾아왔다. 

근 한 달간 워터 히터 없이 태양열로 데워진 자연 온수를 써왔는데 이제는 손 볼 때가 온 것 같다. 따뜻한 물이 펑펑 나오게 되면 또 얼마나 이곳이 한층 더 집다워질까 기대하며, 600불 거금을 들여 온수기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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