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내 삶에는 어지간히 많은 이름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문득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잊어버린 그 이름들에게 미안해졌다. (중략) 유치원 때 내게 눈 까뒤집기를 알려줬던 승호, 승호는 날 기억 못 하겠지만, 나는 승호 덕분에 아직도 눈을 잘 까뒤집는다. 어느 순간 그 승호가 생각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아마 그 녀석은 날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으니까.
-쓸만한 인간 中-
병명을 쉽게 갖다 붙이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나는 '안면 인식 장애'비슷한 것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 못 하는 '병'도 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이 나에게 알은척을 하면 존대를 해야 할지 반만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름을 기억 못 하는 건 더 심해서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다섯 번째 여자친구 이름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장애' 또는 그에 준하는 '질환'정도로 치부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랬다. 하지만 사실 그건 장애도 아니고 질환도 아니고 심지어 기질도 아니다. 내 마음의 문제다. 사람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탓이다. 좀 더 애정을 가지고 얼굴을 한번 더 바라보고, 이름을 한번 더 불러주고, 마음속으로 그 이름들을 품어야만 내 삶에 그 이름들이 붙어 다니는 것이다. 기억하는 얼굴과 이름만큼 삶은 풍성해진다. 문득 내가 외로운 이유가 살면서 놓아버린 이름들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하상욱 시집 같은 느낌이었다. 말장난과 센스를 버무린, 재미는 있지만 깊이는 찰랑찰랑한 그런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든다. 인간 박정민의 연기에 대한 진정성, 겸손, 인간미 등이 꾸밈없이-아 종종 웃기려는 욕심에서의 꾸밈은 있다- 드러나는 아주 '읽을 만한' 에세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읽히고 쉽게 뇌리에 박히지만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