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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vil Jun 13. 2016

08#뮌헨 : 노이에 피나코테크 PartⅠ

[Neue Pinakothek] 친밀하고 비밀스러운 만남.



동경에 마지않던 세기말의 명화들을 만난다는 것은, 마치 목말랐던 과거의 장밋빛 꿈이 실현되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과 흡사하다. 대가들이 잠든 이 곳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알테 피나코테크 앞의 드넓은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루벤스의 그림에 심취해 있다 보면, 로버트 뱅크시의 실루엣이 바람처럼 지나가지 않을까?





mein  Raum in Berlin


4월의 첫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태양은 이미 창문을 통해 방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나와 친구의 아침을 재촉했다. 나는 전에 느꼈던 생의 의욕을 다시 한번 느꼈고, 아침의 신선한 공기처럼 정신을 상쾌하게 해주며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자연과 자신에게 신뢰감을 느끼게 되었다. 친한 친구와 나란히 여행을 하며 도시 곳곳을 누비노라면, 신선한 생의 환희와 욕구를 느끼게 되기 마련이지 않을까?


뮌헨 중앙역 [München Hauptbahnhof]


아침 햇살 속에 스며든 이슬방울들은 섬세한 회색과 흰색의 드넓은 하늘과, 그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아지랑이처럼 부드러운 초록색의 들판에 신비롭고 감동적일 정도로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런 하늘을 가슴에 안은 채 다시 지하철[S-Bahn]에 몸을 싣고, 고흐의 클라티에가 아폴론의 수금 소리를 잊지 못해 여전히 슬픔에 잠겨있는 노이에 피나코테크[Neue Pinakothek]로 향했다.




프로필레엔이 있는 쾨니히스 광장 [Propyläen in Koenigsplatz, München]


나보다 더 먼저 창조된 것이란
영원한 것 외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토록 남아 있으리라.


뮌헨 중앙역에 내려 루이젠 거리[Luisenstrasse]를 따라 3블록을 걸어가면, 뮌헨의 예술 지구인 쿤스트아레알[Kustareal]의 중심인 쾨니히스 광장[Königsplatz]에 다다르게 되는데, 걷는 내내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원이 훌륭하게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묘한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렌바흐하우스 [엘라] 레스토랑 [Restaurant 'Ella' in Lenbachhaus, München]


쾨니히스 광장에는 "이자르 강가의 아테네"라는 너무나도 신화적인 별명을 갖고 있는 고대 그리스식 문인 프로필레엔[Propyläen]이 에우로스와 제피로스 사이에서 여전히 그 웅장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프로필레엔을 중심으로는 뮌헨의 3대 피나코테크[Pinakothek]인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 고 회화관], 노이에 피나코테크[Neue Pinakothek : 근대 회화관],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Pinakothek der Moderne : 현대 회화관]와 더불어, 팔라이스 피나코테크[Palais Pinakothek], 이오니아식으로 건축된 고대 조각 미술관[Glyptothek]과 고대 미술 박물관[Antikensammlungen], 랜바흐하우스(Lenbachhaus/Kunstbau) 등이 고대 신전처럼 애워싸여 있어 언제나 전 세계 미술 및 예술 애호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위, 좌측부터 알테 피나코테크, 노이에 피나코테크,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 고대 조각 박물관, 랜바흐하우스


그중에서도 특히나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구조로 된 알테 피나코테크와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배치는, 미술사적 관점으로 유럽 미술사를 한꺼번에 개관할 수 있는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배치란 말인가? 어느 곳을 먼저 가든지 신비롭고 흥미로운 감각적 몽상에 압도될 것 같다. 알테 피나코테크 앞 드넓은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루벤스의 그림에 심취해 있다 보면, 로버트 뱅크시의 실루엣이 바람처럼 지나가지 않을까?


싱그러운 4월의 햇살이 넘실거리는 알테 피나코테크 앞 잔디밭을 지나서야 마침내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계단 앞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동경에 마지않던 세기말의 명화들을 만난다는 것은, 마치 목말랐던 과거의 장밋빛 꿈이 실현되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과 흡사하다.


알테 피나코테크 앞 잔디광장 [Alte Pinakothek]


부활절 첫날의 주일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히 모였다가 흩어졌다. 이렇게 수많은 인파들이 볕 좋은 부활절 첫 주일에 미술관을 찾는 이유는, 물론 노이네 피나코테크의 유명세도 있겠지만, 다름 아닌 주말의 저렴한 입장료가 한몫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평일 7 Euro인 입장료에 비해 주말은 1 Eruro의 입장료라는 그네들의 배려는 - 물론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그러하지만 -,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적 삶을 소중히 하는 그들의 일상을 단편적으로 나마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정문 [Main gate of Neue Pinakothek]


"갤러리[Gallery]"가 아닌
"피나코테크[Pinakothek]"


노이에 피나코테크 계단 앞에 잠시 앉아 알테 피나코테크를 바라보면서 문득 생각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왜 뮌헨에서는 '피나코테크'일까?"라는 것이다. 이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쾨니히스 광장을 지키고 서 있는 '이자르 강의 아테네'로 시선을 돌려야 할 듯 싶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입구 계단 [Main gate of Neue Pinakothek]


아테네 신전을 연상케 하는 프로필레엔을 떠올리니, 고대 그리스 시대 때 신들을 위한 봉헌화 [奉獻畵 /피나크스(pinax)]를 보존하기 위한 건물이나 장소를 따로 두었다는 기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문화적 관습은 후대에도 계속 이어져, 헬레니즘 제국이었던 페르가몬과 로마에서도 궁전 내에 그림을 모아둔 방을 따로 마련하였는데, 이런 신들을 위한 '봉헌화' 및 '궁전의 예술 수집품을 보관하는 장소'를 "피나코테카 [Pinacotheca : 그림 수집]"라 불렀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그 이후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인본주의 사상으로 돌아가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는, 좀 더 확장되고 전문화된 의미로 '화랑, 회화관'을 "피나코테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화랑, 회화관'이라는 뜻의 독일어 "피나코테크[Pinakothek]"가 '봉헌화' 및 '궁전의 예술 수집품을 보관하는 장소'를 일컫는 라틴어 "피나코테카 [Pinacotheca : 그림 수집]"에서 유래된 것을 생각하니, "피나코테크"란 단어가 지닌 본연의 뜻의 깊이가 어렴풋이 눈앞에 그려졌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외벽 [External walls of Neue Pinakothek]


여타 수많은 미술관들이 미술품을 진열한 좁고 긴 방이나, 또는 폭이 넓은 복도에 걸려있는 모양에서 유래된 "갤러리[Gallery]"라는 영어단어를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게, 뮌헨의 회화관이 애초부터 "피나코테크"란 말을 사용했던 것은 아마도 단어가 가진 유래처럼, 오롯이 궁정에서 수집한 그림을 모아둔 "장소"라는 의미에 더 큰 비중을 두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은 루드비히 1세에 의해 건립된 알테 피나코테크와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설립 배경, 즉 노이에 피나코테크라는 회화관이 지금에 있기까지의 일화들을 떠올린다면, 왜 단순한 "갤러리"가 아닌 "피나코테크"란 단어을 선택했는지 조금은 쉽게 와 닿을지도 모른다.




초기 건립 당시의 노이에 피나코테크 [early Architectures of Neue Pinakothek]


근대 미술의 보고


노이에 피나코테크도 알테 피나코테크와 마찬가지로 루드비히 1세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1846년 왕의 개인 금고에서 출자된 건축 기금으로 레오 폰 클렌체[Leo von Klenze]와 프리드리히 폰 게르트너[Friedrich von Gärtner], 아우구스트 폰 보이트[august von Voit]에 의해 설계된 초기 건축은, 1853에 완공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기 시작되었다.


루드비히 1세 초상화 / 조각상 [portrait & statue, König Ludwig I]


1818년, 로마에서 활동했던 젊은 독일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하면서 시작된 루드비히의 개인 소장품들은, 그가 바이에른 왕에 즉위한 후 바이에른 왕실 컬렉션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나 호프가르텐[Hofgarten : 궁정]에서 바이에른 왕가 거주지인 레지덴츠[Residenz] 궁까지 이어지는 통로에 전시할 목적으로, 당대의 화가 칼 로트만[Carl Rottmann]에게 의뢰한 23점의 그리스의 풍경화나, 프란트 루드비히 카텔[Fran Ludwig Catel], 게오르크 폰 딜리스[Georg von Dillis],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슈펠트[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등의 작품들로 구성된 58점의 '레오 폰 클렌체[Leo von Klenze] 컬렉션'과, 빌헬름 카울바흐[Wilhelm Kaulbach]의 '예루살렘의 파괴'라는 작품 등으로 루드비히 1세의 컬렉션이 더욱 풍부해졌고,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작품들을 확대시켜 갔다. 급기야 증가된 컬렉션으로 인해, 알테 피나코테크로부터 분리된 노이에 피나코테크는, 근대 미술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점점 더 많은 작품들이 모이기 시작해, 루드비히 1세가 세상을 떠날 당시에는 소장품들이 425점으로 증가되기까지 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칼 로트만'의 전시실 6 [Hall 6 of Carl Rottmann in Neue Pinakothek]


하지만, 그 후로 왕가에서는 작품을 구입하는 일을 지속하지 못했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바이에른 정부에서 당대 미술가들의 예술 작품을 구입하는 독립적인 예산을 마련하면서부터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소장품들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의 작품들도 함께 구입을 하였는데, 특히 20세기 초 쿠르베의 '사과 정물화', '성난 말', 마네의 '스튜디오에서의 아침식사',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센 강 다리', 고흐의 '아를의 풍경', '해바라기', 고갱의 '탄생', 세잔의 '서랍장이 있는 정물', '자화상', 도미에의 '드라마', 호들러의 '제나의 탄생' 등, 이른바 "츄디[Hugo von Tschdi] 컬렉션"으로 불리는 작품들은 이 시기에 노이에 피나코테크에서 구입한 44점의 작품들 중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역사 전시실 [Concept of history in Neue Pinakothek]


이런 역사적 배경을 두루 살펴보면, 루드비히 1세에 의해 수집된 궁정 미술품에서 바이에른 정부에 의해 지속된 수집품들을 보관하는 장소를 "피나코테크" 외에 달리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은, 비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리라... 현재는 뮌헨과 이탈리아 시에나의 회화관만이 "피나코테크"로 불리고 있지만, 뮌헨의 3대 미술관(알테, 노이에, 모데르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을 볼 때, "피나코테크"란 곳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물론이지만, 미래에도 영원히 뮌헨의 "피나코테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초기 건립 당시의 노이에 피나코테크 스케치 [Early Architectures of Neue Pinakothek]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이 회화관은, 알렉산더 프라이헤어 폰 브란카[Alexander Freiherr von Branca]에 의해 재 설계된 것이다. 루드비히 1세에 의해 설립된 초기 회화관은 르네상스의 향수가 짙게 묻어나는 설계로, 알테 피나코테크의 외관과 유사성을 띠고 있었으나, 신축된 회화관의 외면은 이탈리아 왕궁처럼 벽돌로 이루어졌고, 지붕의 훔통 바로 아래 여러 인물을 다룬 채색 프리즈가 있는 파격적인 포스트 모던한 미술관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재 건축이 진행되는 당시 소장된 작품들은 잠시 "예술의 집[Haus der Kunst]"이라는 곳으로 옮겨 임시로 전시되었다가, 1981년 노이에 피나코테크가 재개관되면서, 신고전주의 작품에부터 20세기 초 근대 회화에 이르는 작품들과 함께 다시 전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외벽 [External walls of Neue Pinakothek]


노이에 피나코테크는
현시대와 미래의 회화들을 위한 미술관이 될 것이다


'노이에 피나코테크[Neue Pinakothek]'는 "피나코테크[Pinakothek]"란 단어와 '새로운, 신(新)'이라는 의미인 독일어 "노이에[Neue]"가 합성된 단어로, '근대 회화 미술관'을 말한다. 그 이름에서 반영이라도 하는 듯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품 이후의 작품들, 즉 18C 중반에서 20C 유럽 명화들을 소장하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색채가 강한 근대 회화관으로, 관람하지 않아도 전시 작품들의 시대 흐름이 뇌리 속에서 한편의 파노라마가 되어 흘러갈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렇듯 유럽 최초의 공립 미술관으로 설립된 노이에 피나코테크는, 루드비히 1세가 "노이에 피나코테크는 현시대와 미래의 회화들을 위한 미술관이 될 것이다."라는 초기 준공 연설에서도 시사한바처럼, 현재는 유럽의 근대 미술작품들을 광범위하게 망라한, 서양 근대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로비 벽에 새겨진 신축 메세지


현재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소장품 수는 5,000여 점에 이르고 있지만, 이 가운데 1/10 가량인 550여 점만이 전시되어 전 세계인을 맞이한다. 특히 프란시스코 고야의 "털뜯긴 칠면조"와 슈피츠 벡의 "가난한 시인" 이외에 마네의 "아틀리에에서의 아침식사", 고흐의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모네, 르느와르, 고갱, 세잔느의 그림과 함께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여러 작품들, 그리고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들라크루아, 프랑스 사실주의 예술가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까지,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 언제나 그곳에서 소리 없이 전 세계인 들을 기다리고 있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Neue Pinakothek]


그러나 이런 대가들의 숨결에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노이에 피나코테크의 미술관장이었던 휴고 폰 츄디[Hugo von Tschdi]의 미망인이 따로 간직해 두었다가 기증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1938년 나치가 '퇴폐적'이라는 딱지를 붙인 탓에 소장품에서 재외 되었다는 점이다. 이 자화상은 그 후 스위스에서 경매를 거친 뒤 현재는 미국에 걸려있다. 이런 소소한 것을 재외 한다면 대가들이 잠든 이 곳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 것이다.


09#뮌헨 : 노이에 피타코테크 Part II에 계속....


노이에 피타코테크 1층 로비 [Lobby of Neue Pinakoth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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