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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기업화: 몰락하는 대학에 관하여』를 읽고
이 글은 신간 『대학의 기업화: 몰락하는 대학에 관하여』(고부응 지음, 한울아카데미)를 소개하는 글이다. 읽은 책에 대한 글은 가끔 쓰지만 지금처럼 책을 소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글을 쓴 적은 별로 없었다. 책을 많이 팔고자하는 홍보는 당연히 출판사가 할 터이고 저자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저자인 고부응 선생님이 책을 팔아 돈을 벌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에 이 책이 많이 팔리는 것보다 이 책을 꼭 읽으면 좋을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이 책을 꼭 읽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로는 대학의 중심 주체인 교수들이 우선 들어가겠고 국가의 교육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의 가장 큰 수혜자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가장 먼저 권하겠다. 따라서 이 글은 이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주로 말하게 될 것이다.
저자인 고부응 선생님(중앙대 영문학과)은 나의 대학원 지도교수시다. 나는 현재 시간강사이기도 하지만 문화예술교육가들의 협동조합에서 활동한다. 이 글은 협동조합 마을온예술 소식지에 실을 예정이며 소식지 일정에 맞추기 위해 급하게 글을 쓰는 점도 밝힌다. 서평과 같은 공식적인 글이라기보다 매우 사적인 글이 될 것 같아 선생님께 누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 가지 더 밝히자면 나는 이 글을 책 전체를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1장 문제는 사립대학, 2장 대학의 역사: 근대 대학의 형성을 중심으로 그리고 11장 인문학의 몰락, 이렇게 세 장을 읽고 쓰는 것이다. 겨우 세 장을 읽고 책 소개를 하는 이 뻔뻔함을 나무랄 독자가 있겠지만 책의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독자들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며 책의 두 세장 정도 골라 읽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독자 흉내를 내 보면서 또 한 가지 변명을 해 보자면 이렇다. 오랜 시간 선생님과 보낸 시간이 있기에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의 많은 부분을 선생님께 들어 알고 있으며 논문으로 발표했던 내용들 또한 미리 읽어둔 것이 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대충 알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으므로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영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대학 안에서 일하려는 생각보다 대학 밖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컸다. 시간강사로 강의는 조금씩 하고 있지만 그 동안 한 일을 돌아보면 대학이 아니라 초중고 학교 예술강사 파견 사업이나 서울시민예술대학 등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일은 무엇보다 동네 책방에서 책 읽는 모임을 하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대학이 아닌 곳에서 다시 말하면 내가 사는 마을에서 마을교육 관련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을교육에서는 대학 교육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을교육을 하다보면 항상 대학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중학교만 들어가면 학교와 학원가기에 바빠 문화예술을 즐길 시간이 없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입시에만 매어있는 청소년들의 현재가 안타깝고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게 된다. 대학 교육이 취업 준비가 되어버린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교육은 입시와 취업교육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육과 학교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교육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없을 것이다.
책모임에 대해 부연하자면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읽은 작품이 너무 없다는 생각에 영미문학 중심의 소설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문학 중심의 책을 읽다가 지금은 자연스럽게 철학 공부로 이어졌다. 대학원부터만 치더라도 공부에만 모든 노력을 쏟아 부은 시간이 십 여 년이 넘는데도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에 공부의 방식이 잘 못 됐었는지 돌아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영문학과 대학원 커리큘럼을 보면 한 학기에 소설을 기준으로 작품 5~6개 읽고 페이퍼를 쓴다. 이론 과목에서는 들뢰즈나 탈구조주의 이론가들의 이론을 논문과 책 중심으로 몇 개를 소화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이론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나만의 철학이 없다는 자괴감을 느끼기 일쑤였다. 때로는 내가 공부를 못 해서, 아니면 전략적으로 공부를 할 줄 몰라서 등의 자책어린 생각도 해 보고 교수들이 더 엄격하게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아닐지 현 교육체제를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면서 진짜 공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한 것이 사실이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이가 들고 공부를 많이 했어도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에 대해 대답하기 어렵다. 열심히 일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고 야근으로 자기 시간이 없다는 후배들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라고도 그렇다고 비굴하게 참으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진짜 공부라고 그 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과 내가 다시 하고자 하는 공부를 구분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 따져보면 학교 공부가 직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와 더 나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공부에 대한 나의 고민은 교육의 목표와 연관해서 살펴봐야할 문제다. 특히 대학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 현재 대학 교육은 취업교육이 중심이 된 지 오래다. 취업 교육을 대학에서 담당하는 게 맞는 것일까? 현재의 교육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적에 대한 공통의 생각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이상이나 모델이 없는 정책들은 또 다른 문제를 계속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자이면서 사상가인 데이비드 봄은 자신의 책 『창조적 대화론』에서 우리가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를 하려면 우선 사고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봄은 환경문제, 생태문제는 우리가 세상의 자원은 무한하며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오염은 결국 분해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은 단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오염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다른 문제들이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결국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어떤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대학의 기업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 책은 대학의 기업화가 문제라고 말하지만 현재의 문제점을 살피는 것에 앞서 대학 교육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할지 그리고 이상적인 대학의 모델은 무엇인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이론적으로 살핀다. 저자가 들어가는 말에서 이야기하듯이 이론적이고, 역사적이고, 더 체계적으로 대학 문제를 다루는 점이 바로 이 책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상적인 대학의 모델은 칸트가 이미 제시했으며 우리는 그 모델을 되살리면 된다고 말한다. 즉 칸트, 훔볼트의 신념에 의해 설립된 근대 대학인 베를린대학교를 이상적인 모델에 가깝게 제시한다.
저자는 우선 대학, University를 자율적 학문공동체라 말한다. 대학이 자율적 학문공동체라니? 그렇다면 이 세상에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학교라는 이름의 여러 대학을 제외하더라도 수많은 대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동네에서 소소하게 함께 모여 공부하는 것도 대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율적 학습공동체라는 말에서는 대학의 자율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율이라면 무엇으로부터의 자율일까? 저자는 칸트의 『학부간의 논쟁』이라는 책을 통해 “학문 추구 자체가 목적인 순수 학문은 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정부의 지침과는 관련이 없다”(57)고 주장한다. 순수학문 즉 철학은 진리 추구의 사명이 있고 칸트에게 진리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이런 철학은 신학, 법학, 의학 등의 학문들이 이성과 부합하는지 검증해야 하는 의무도 지닌다. 칸트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학문들의 최종 심급은 철학과 만난다. 칸트는 법과 제도라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 국가가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부 교수들이 검증하는 형태를 통해 국가 역시 이성에 의해 통치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이런 칸트의 생각은 훔볼트로 이어져 그는 대학의 목표를 민족(국민)의 지적•정신적 성숙에 두었으며 그의 이런 신념이 베를린대학교 설립에서 이어진다. 칸트의 국가관 또는 칸트가 생각한 국가와 대학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대학의 학문 발전이 국가의 민족구성원의 지적•정신적 성숙을 가져온다는 훔볼트의 주장은 결국 대학 교육의 목표가 민족 또는 국가라는 공적인 부분의 발전과 성장에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학은 국가의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맞다. 훔볼트는 대학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대학의 구성에 대한 틀과 물질적 지원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79) 국립대학들도 사립대학처럼 운영되는 우리나라 대학 시스템 상 수업료 없이 국가가 물질적 지원을 해주는 모델을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대학의 목표가 합의되고 대학의 공적 가치가 인정 된다면 그 해결책으로 저자가 주장하듯이 사립대학을 없애고 수업료 없는 학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이상적인 대학은 쉽게 말해 철학이 중심이 되는 학교다, 앞에서 대학을 자율적인 학습공동체라 했을 때 이번에는 학습의 내용에 관해 질문해 볼 수 있겠다. 19세기 초 독일 대학에 와서 인문학이 대학의 주도적 학문이 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철학이 중심이 되는 학교를 주장한 칸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를린대학교는 학문추구를 통해 인간의 완성이라는 인문학의 이상이 구체화된 곳이다. 대학은 교양인 즉 국가의 이상적인 구성원을 양성하는 곳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도입된 대학의 학과 체제는 학문 발전에 의해 필연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전인을 양성한다는 교육의 목표에는 적합하지 않다. 저자는 분과학문이 심화된 오늘날 교양과정에서조차 철학, 문학, 수학 교육이 설 자리가 없으며 그나마 교양과정을 이수하는 과정에서도 학생의 취향과 선택에 의해 교양과정을 마치는 현실 등을 돌아보며 분과학문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학문들을 이끄는 역할을 철학이 해야한다고 말했던 칸트를 다시 언급한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의 소수 엘리트 대학만이 인문학 교육을 하고 있으며 미국 중심의 지구화 시대에 미국의 일반 대학은 물론 우리나라의 대학 교육을 받아봤자 피지배계급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소수 엘리트 인문학 교육을 받은 자들은 세계의 지도자가 되겠지만 이들은 인문학의 비판 정신이 아니라 기존 지배계급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인문학의 비판 정신을 이어가면서 진보적인 담론을 이끄는 현대의 철학자들은 현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데는 무기력하다.
인문학자는 분과학문 시스템이 양산한 직업인으로서의 전문가여서는 안 된다. 저자는 인문학자는 전문 직업인이 아니라 아마추어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74) 아마추어라는 말은 어떤 이익이나 보상 없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듯이 아마추어 지식인은 사적인 이익이나 보상보다는 더 큰 사상이나 가치 중심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만이 아니라 그 분야를 넘으며 세상을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학문의 전문화에 대한 위험에 대해서는 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했지만 니체 역시 당대의 철학이 무르익을 수 없는 여러 위험 중 하나로 전문화를 언급한다. 학문의 규모와 탑의 구조물이 거대하게 성장하였고 그래서 철학자는 이미 배우는 자로서 지쳐버리게 되거나 스스로 어느 곳엔 가애 달라붙어 ‘전문화’되어서 전망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선악의 저편 172). 전문화되어 버린 철학자는 더 이상 지도할 위치에 있지 못하며 철학은 취향으로 전락해 버리고 철학자는 사기꾼이 되어버린다. 철학자는 “학문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과 삶의 가치를 판단”(선악의 저편 173)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다. 학문이 아니라 삶이 문제이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인 것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분야만 아는 직업 전문이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말했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아마추어 지식인으로 나를 규정해보면서 진리를 쫓는 철학자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학의 기업화라는 현 대학의 몰락을 짚어보는 보고서 같은 제목의 이 책은 대학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철학과 인문학을 해야 하는 당위와 필요를 상기시킨다. 누구나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철학이나 인문학이 사회에서 대접받고 법이나 의학, 종교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철학이 기준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철학은 전문직업인으로서 철학자들의 이해관계가 들어간 철학이어서는 안 된다. 철학자들이 많은 세상, 아마추어 지식인으로서의 철학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아직은 인간의 의지를 믿으며 절망하지 않을 때라 믿고 싶다.
*참고자료
1) 봄 데이비드, 『창조적 대화론』. 깅혜정 역. 에이지이십일, 2011.
2)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 불리는 볼료냐대학교(University of Bologna)는 학생들이 교수를 임명하는 학생조합 즉 학생 중심 대학이었고 이후 교수들의 조합과 도시나 종교가 결탁한 형태의 교수 중심 대학으로 변한다. 저자는 전근대 대학에 대한 설명을 하고 칸트의 이성에 기초한 대학을 근대대학의 초석으로 논의하며 “민족(국민)이 지적ㆍ정신적 성장”(67)에 두고 있다.
3) 니체 프레드리히. <니체 전집 14: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김정현 역. 책세상, 2012.
글. 김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