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고개」- 절망 속에서 발견한 희망

키르케고르의 ‘절망 - 죽음에 이르는 병’의 관점에서

by 황보현



참고문헌:
http://18children.president.pa.go.kr/our_space/fairy_tales.php?srh%5Bcategory%5D=07&srh%5Bpage%5D=2&srh%5Bview_mode%5D=detail&srh%5Bseq%5D=1177


1.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삼 년 고개」 해석하기


'절망'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삼 년 고개」는 인생의 근본적 절망에 대한 이야기로써, 우리 모두에게 진중한 통찰을 전달합니다. 「삼 년 고개」를 흔히 발상의 전환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부정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인 관점으로의 발상의 전환을 통해, 꼬부랑 할아버지처럼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꼬부랑 할아버지가 그토록 심각하게 병든 상황에서, 발상의 전환만으로 그 병에서 극적으로 회복되었다고 보는 게 과연 논리적일까요? 사실이지, 그러한 관점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삼 년 고개」의 숨은 가치는 그렇게 가벼운 방식으로 보아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관점(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삼 년 고개」 속 할아버지의 절망과 희망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삶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실존적인 절망을 올바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2. 꼬부랑 할아버지 - 실존적 절망에 빠지다


꼬부랑 할아버지는 실존적인 절망을 경험하는 인물입니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절망은 슬픔과 같은 감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 슬픔을 느낍니다. 자신이 삼 년 고개에서 넘어졌다는 사실로 인해 땅을 치며 울지요. 이렇듯 슬픔은 흔히 울음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할아버지는 슬픔을 넘어 절망에 빠집니다. 그가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몸져눕고 만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전망과 죽음을 앞두었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실존적인 절망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은 영원히 살기를 소망하지만 유한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동경하며 살아가지요. 이런 괴리로 인하여 인간은 근본적으로 절망에 빠집니다. 죽음을 앞두고서 절망하는 꼬부랑 할아버지는 키르케고르가 지적한 이런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할아버지는 장수하고 싶지만 삼 년 고개에서 넘어져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절망합니다. 무한한 삶을 동경하지만, 유한한 인생으로 인해 절망합니다. 분명히, 꼬부랑 할아버지는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진 일을 계기로 실존적 절망에 빠진 겁니다.


할아버지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할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는 키르케고르적 절망을 제대로 파악했을까요? 할멈과 박 의원은 몸져누운 할아버지를 피상적으로 진단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신체적 질병에 유의하여, 의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요. 할아버지의 배와 눈과 입을 만져보지만, 절망을 진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반면, 어린 손자는 몸져누운 할아버지를 근본적으로 통찰합니다. 속에 숨겨진 마음의 질병에 유의하여, 실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요. 할아버지의 사고와 경험에 접근하면서, 절망을 진단해냅니다. "어쩌다 병이 나신 거예요?"라는 손자의 질문은 할아버지가 겪는 신체적 질병 이면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할아버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라고 답합니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대답이 키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을 정확히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영원을 동경하지만 죽음을 전망하기에, 할아버지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 절망이 신체적 질병으로도 나타나는 것이지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손자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절망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근본적인 절망에 침체되어서 신체적인 질병에도 빠져버린 겁니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실존적인 절망을 경험하게 될 때가 오지 않을까요? 그와 같은 좌절의 입구에 이미 발을 디딘 적이 있습니까? 다양한 삶의 부면에서 완전과 영원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많이 모자라고 한계 투성이라는 걸 체감하지 않으시나요? 3년 남은 수명의 숙명을 깨닫게 한 삼 년 고개 앞에서 체념한 꼬부랑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단순한 슬픔의 차원을 넘어 절망적 시련을 만나면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내면의 실존이 고통스러우면, 할아버지처럼 표면의 몸마저 병들 수 있습니다. 어린 손자처럼, 우리의 고통을 잘 진단하고 이해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의 표면이 아니라 내면을 보아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의 아픔 너머에 있는 절망을 보아줄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절체절명의 좌절을 온전히 인식하고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3. 꼬부랑 할아버지 -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역설적이게도, 꼬부랑 할아버지는 그 절망 속에서 실존적인 희망을 발견합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기독교인인 그에 따르면, 삶의 절망과 마주하다가 기독교적인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믿게 되면, 절망 속에서 근본적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눈앞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면 절망하지만, 죽음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맞추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죠. 어린 손자가 꼬부랑 할아버지에게 제시한 처방안이 키르케고르가 말한 희망과 그 이치가 유사한 것 같지 않으십니까? 할아버지는 삼 년 고개를 계기로 실존적 절망에 빠져 있었지요. 하지만 손자는 삼 년 고개를 실존적 희망의 계기로 전환하는 처방안을 내놓습니다. 삼 년 고개에서 여러 번 반복해 넘어지면, 3의 배수만큼 오랫동안 생명을 누릴 거라 말하지요. 이 순간, 할아버지는 죽음으로 인한 절망이 아니라 장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됩니다. 이 희망은 절망 속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었으며, 이 희망은 근본적이고도 실존적인 것이었지요. 분명히, 꼬부랑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처방을 계기로 죽음의 절망 속에서 생명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어린 손자가 제시한 키르케고르적인 희망은 어떻게 할아버지의 절망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어린 손자가 제시한 희망이 할아버지가 가졌던 과한 절망보다 논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종전에 할아버지는 삼 년 고개에서 1번 넘어지면 3년 살 수 있고, 2번 넘어지면 3개월만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추리했습니다(전래되는 타 문헌에 따름). 삼 년 고개를 절망적으로 바라본 겁니다. 동시에 이는 비논리적인 관점입니다. 1번 넘어지면 3년 사는 것과 2번 넘어지면 3개월 산다는 것 사이에는 수학적인 일관성이 없지요? 그에 반해, 어린 손자는 삼 년 고개에서 1번 넘어지면 3년 살 수 있고, 2번 넘어지면 6년을 살 수 있고, 3번 넘어지면 9년을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내놓습니다. 삼 년 고개를 희망적으로 바라본 겁니다. 동시에 이는 논리적인 관점입니다. 함수 y=3x (x=삼 년 고개에서 넘어진 횟수, y=남은 수명)로 설명이 됩니다. 수학적으로 이치적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할아버지는 손자가 제시한 희망이 합리적이라 느꼈겠지요? 결국 할아버지는 삼 년 고개에 대해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미신을 포기합니다. 동시에 어린 손자가 전해준 진실을 수용합니다. 이제 할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손자가 내놓은 희망은 할아버지가 품은 지나친 절망을 압도합니다. 참으로, 절망의 흙 속에서 희망이 싹텄습니다.



꼬부랑 할아버지처럼 우리도 삶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절망은 희망을 찾아가기 위한 조건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위기는 기회라고들 하는데, 그렇게 보면 절망은 희망이지 않을까요? 죽을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 살 것 같게 해주는 희망을 발견하시기를 정말 바랍니다. 희망이 미신적인 좌절보다 더 논리적인 형태로 다가와서, 당신의 좌절을 완전히 압도해버리기를 소원합니다. 절망의 흙 속에서 희망이 싹트기를 진실로 소원합니다. 우리의 체념한 마음에 희망의 씨앗을 심어줄 어린 손자는 누구일까요? 절망에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꼬부랑 할아버지처럼, 우리는 분명히 절망 속에서 근본적인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 절망 속에서 발견한 행복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삼 년 고개」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영원한 삶에 대한 동경과 유한한 수명에 대한 인식 사이에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가 절망했기에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합니다. 절망을 야기한 삼 년 고개가 이제는 희망을 주는 고개가 된 것이죠. 인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삼 년 고개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왜 우리는 근본적인 절망에 빠지곤 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그 절망으로 인해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절망적인 인생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특별한 희망을 올려다보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다시 되짚어 보시죠. 두 가지 시점이 있습니다. (1) 꼬부랑 할아버지가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지기 전. 이때 할아버지는 절망도 희망도 모두 몰랐습니다. (2) 꼬부랑 할아버지가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지고 어린 손자의 처방을 받아들인 후. 이때 할아버지는 절망도 희망도 모두 인식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볼까요? 할아버지가 진정한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시점은 언제일까요? 할아버지가 절망도 희망도 몰랐을 때에는 안녕한 나날을 살았을 수는 있지만 실존적인 행복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반면, 할아버지가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진 후 절체절명의 절망도 경험하고 또 그 속에서 극적인 희망을 찾았을 때, 바로 그때에 할아버지는 비로소 삶의 근본적 기쁨을 느꼈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손자의 말을 들은 후 삼 년 고개를 계속해서 구르면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바로 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야말로 실존적인 행복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무엇을 시사합니까? 근본적인 행복은 우리가 절망과 희망 모두 경험한 후에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하다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절망은 앞으로 발견할 진정한 행복을 위한 과정이지 않겠습니까? 절망 속에서 희망과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본 「삼 년 고개」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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