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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일당 Aug 19. 2021

사춘기가 제때 오란 법 없다

만년 사춘기

162일째, 서른 


 “엄마 미워!”

 유리잔도 잠시 흔들린 것 같은 쨍한 고음이 울린다.

잔뜩 심통 난 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달래는 말을 하던 서른한 살 엄마가 말하는 입 모양이 

 “미. 운. 다. 섯. 살”.

 미운 여섯 살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사람들이 하도 “빨리, 빨리!” 하다 보니 미운 시기도 빨라졌는지 ‘미운 다섯 살’, ‘미운 네 살’이라는 말도 쓴다고 한다. 피는 안 섞인 우정으로 맺어진 나의 첫 조카는 지금 미운 다섯 살이다. 여기서 ‘밉다’는 싫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 거슬리게 되고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는 뜻이다. 어제는 토끼 인형을 좋아했다가 오늘은 꼴도 보기 싫다며 우는 아이를 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세 살 때부터 조카를 봤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래, 너는 꼭 사춘기를 겪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아이 엄마 말이 이춘기, 삼춘기, 사춘기가 어느 시기에 딱 떨어지는 게 아니고 계속 들락날락한단다. 엄마 말을 듣고 싶다가, 말을 듣기 싫다가, 엄마한테 붙어있고 싶다가도, 또 독립하고 싶다가... 이마를 탁 쳤다.

 ‘세상에! 아이야, 너도 그래? 나도 그래!’

 서른 먹은 이모도 딱 너처럼 그렇다니까? 다른 게 있다면 너에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지만 나는 엄마가 아닌 엄마가 사는 세상을 공유할 뿐 아니라 거기다 헤아릴 수 없게 많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 복잡하고 동시에 단순할 수 있는 세상이 어느 날은 좋았다가 또 다른 날은 싫었다가 들락날락한다. 그동안 이춘기, 삼춘기가 몇십, 몇백 번은 들락날락해서 문지방이 빤빤해지도록 닳고도 남았을 거다. 바로 그런 시기가 나의 조카에게 처음 왔다. 불쑥, 문지방을 밟고 들어온 사춘기. 다섯 살짜리에게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낀다. 아이도 처음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놀라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사춘기는 왜 한 철만 지나면 끝나는 것처럼 여겨질까. 바람과 파도의 성질만 봐도 그렇지 않은데. 인생의 모든 시기가 질풍노도의 시기 같은데 말이다. 뒤이어 아이 엄마가 말한다. 

 “그러면서 자라는 거래.”

장하다. 아이가 사춘기를 잘 보내고 더 잘 보내서가 아니라, 그저 포기 않고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게 장하고 기특하다. 

아직 회피할 줄 모르는 아이는 온몸으로 사춘기를 맞는다. 그래서 하루가 다르게 더 아프고 눈에 띄게 더 자라는지도 모르겠다.

 회피를 배운 어른은 덜 아픈 대신, 덜 자라기로 선택했다. 그렇다고 어른이 약았다 손가락질 못 하겠다. 달리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 부를까. 질풍노도는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대단히 빠르게 불어오는 바람과 미친 듯이 닥쳐오는 파도’. 장정도 질풍노도는 견디기 힘겨운 것이다. 회피는 거센 바람과 닥쳐오는 파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약간의 처세술이다. 그마저도 바람의 풍속과 파도의 모양에 따라서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아이와 대화가 가능할 만큼 자랐을 때 이 얘기를 들려준다면 실망할까? 가장 힘들었던 너의 삼사춘기가 이름만 바뀌고 이렇다 할 이론이 없을 뿐이지,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것, 좀 많이 힘들 수 있지만 그러면서 자라는 법이라고. 나이로 여섯 배수나 차이 나는 이모가 그렇게 자라는 너를 보며 ‘참말이구나, 그리고 이모도 자라는 중이구나’하고 위안을 얻었다고.

 그래도 아가야, 실망도 기대도 너의 자유지만 나의 작은 바람은 기대가 됐으면 좋겠다. ‘아직도 질풍노도를 겪고 있으면서 노련해지지도 않는가, 늘 처음인 것처럼 그때마다 마구 흔들리는 이모가 사실은 부러 겪고 즐기고 있는 거 아냐?’ 하는 의심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춘기에 관해 한바탕 토론을 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너와 같이, 또 홀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이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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