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인 지하철 1호선 열차 안에 두 여자가 서있습니다. 한 명은 30대 젊은 여자이고, 또 한 명은 70대 할머니입니다. 때마침 자리가 났을 때 얼씨구나 바로 착석한 젊은 여자는 잠시 뒤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할머니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거운 짐들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거든요. 하지만 무거운 엉덩이는 이미 의자에 찰싹 붙어버린 상황. 주저하는 사이, 할머니는 그다음 정거장에서 내립니다. 젊은 여자가 “어르신, 여기 앉으세요.”라고 교양 있게 말할 기회는 닫힌 문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실, 젊은 여자에게는 순간의 염치보다 자신의 몸이 요구하는 바가 더 중요했습니다. 항암 부작용에 시달리던 그녀의 몸은 의자에 앉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거든요. 네. 이쯤 되면 눈치채셨겠지만, 이야기 속 젊은 여자는 저입니다.
겉모습은 젊지만 몸은 급속도로 늙어버린 상태. 요즘 저는 ‘급가속노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암에 걸린 뒤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지만, 사실 몸상태만 두고 보면 꿈은 이미 이뤄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생리적으로는 이미 할머니에 가깝습니다. 얼굴에는 검버섯같은 기미가 잔뜩 올라와 있고 머리숱은 빈약해졌으며 체력은 바닥나 오래 걷기가 힘듭니다. 숨을 몰아쉬며 달리기를 한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입니다. 참, 정정하겠습니다. 동네 공원에서 게이트볼 치는 어르신들이 저보다는 체력이 좋겠네요. 노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체력이 안 좋은 건 아닙니다.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자신을 이렇게 합리화하겠습니다.
스스로가 할머니나 다름없다고 상기시키는 상황은 일상에서 이런 식으로 종종 튀어나옵니다. 국가암검진을 받으러 산부인과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생리하시니까 여기에 체크하시면 돼요.”
설문조사에 폐경 여부를 묻는 문항이 있었는데, 안내해 주는 직원은 제가 당연히 ‘생리 중’에 체크할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생리 중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이 민망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폐경’ 두 글자에 동그라미를 쳤습니다. 세상엔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 여자라고 해서 생리를 할 거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울 수는 있어도 당연하지는 않습니다.
생리를 안 한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항암치료를 거듭하며 임신가능성과 관련된 수치가 바닥이 된 지는 더 오래전 일입니다. 더 이상 난소보호를 목적으로 루프린 주사도 맞지 않습니다. 끝없는 항암을 받아들였던 순간 여성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도 내려놓았습니다. 20년 넘게 매달 나를 괴롭혔던 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슬픈 일이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닮은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항암을 시작하게 되어 난임센터를 찾았을 때, 당시 제 몸은 난자를 채취해 얼릴 수 없는 상태 (해도 무의미한 상태)였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제 임신은 불가능한 거냐고 묻는 저에게 난임센터 교수는 ’ 기적‘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 순간 마음이 조금 무너졌던 것 같습니다. 그날 진료실 안에는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함께 있었습니다.
“난 나중에 입양하는 것도 생각했었어. “
저녁을 먹으면서 남자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정기검진으로 CT나 MRI를 그렇게 자주 찍는데 애초에 임신은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면서요. 나를 위로하려고 꺼낸 그의 말에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 암은 내 인생만 망치려 드는 게 아니구나.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범했을 이 사람의 인생도 같이 헤집어드는구나. 처음으로 남자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얼굴조차 뵌 적 없는 그의 부모님께도 죄송했습니다. 암에 걸린 건 내 잘못이 아닌데 왜 자꾸 미안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까요. 너무 억울합니다! 이런 때는 지긋지긋한 생리통에서 해방됐으며, 매달 나가던 생리대값이 절약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떠올려봅니다. 아, 위로가 안되려나…? 정신승리라고 칩시다.
나이는 매년 한 살씩 먹는 게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지만, 끝없는 항암치료를 견뎌야 하는 암환자에게는 다릅니다. 그들에게 1년을 살아냈다는 건 몇 년 치 나이를 한꺼번에 먹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항암 부작용이 무섭습니다.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한 말의 의미가 빨리 나이 들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가능하면 요즘 유행하는 저속노화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항암제라는 녀석이 자꾸만 급가속페달을 밟게 합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나이 듦조차 공평하지 않은 걸까요. 또 억울합니다.
대단한 걸 바란 적도 없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단지 소중한 사람들과 같은 속도, 시간대로 천천히 나이 들어가는 걸 바랄 뿐입니다. 그게 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