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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by 이소소 Mar 16. 2025



“나 할머니가 되고 싶어.”


 어느 날, 평소 엉뚱한 말을 잘 하던 친구 H가 내게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너 내 맘 속에 들어왔다 나갔니?’ 깜짝 놀라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래.”


그날 이후 우리의 꿈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여자들의 꿈 치고는 소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우린 나름 진지했습니다. 훗날 칠순 잔치의 초대손님 1순위로 상대방을 점찍어 둘 정도였으니까요.


할머니가 되고 싶은 우리는 상상력이 풍부해 이따금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것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었습니다. 암환자라는 사실입니다.


“나 암이라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먼저 유방암으로 투병중이던 저에게 그녀가 갑자기 날린 폭탄. 걱정과 당혹스러움은 애써 숨긴 채 알고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그녀를 다독였습니다. 괜찮아. 너는 이겨낼 수 있어. 모든 건 마음에 달린거야. 미리 지옥에 살지말자. 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루에도 수차례 되뇌이는 말이었기에 마치 자동응답기의 멘트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했고 운이 좋아 수술도 빨리 진행되었으며,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덕분에 그녀는 씩씩하게 암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녀에게는 살아야할 이유가 너무 많았습니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새댁이었던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편과 소중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일적으로도 충분히 인정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곳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직 젊고,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

그건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할머니가 되기를 바랐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녀로 인해 동병상련이라는 단어를 완벽히 이해했습니다. 아마 그녀 또한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영원히 할머니가 될 수 없었습니다. 2023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 친구는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술 이후 암이 급격하게 전이되어 항암치료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암성통증의 고통이 분초마다 엄습하던 어느 순간부터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말이나 자주했던 칠순잔치 타령도 더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할머니가 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녀가 오늘 하루를 평온하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매일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젊고 예뻤던 내 친구는 그렇게 할머니가 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어쩐지 주름진 그녀의 얼굴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더라니. 부고 문자를 받고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을 보기 전까지만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1년 전 결혼식장에서 해사하게 웃던 얼굴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그날, 저는 친구이자 동지였던 존재를 잃어버린 슬픔과 혼자 남아 긴 싸움을 하게 된 상실감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날의 눈물은 그녀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얄궂게도 수술로 제거했던 암이 또 다시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장례식장이라는 장소의 특수성 덕분에 저는 목놓아 울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떠난 뒤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꿈은 이제 혼자만의 꿈이 되었습니다. 네가 못다한 꿈, 내가 이뤄볼게.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평범하게 나이를 먹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걸 요즘따라 뼈저리게 느낍니다. 잊을만 하면 암세포는 지독하게 성실하게 내 몸에 찾아왔습니다. 덕분에 저는 지난 5년동안 세번의 전신마취 수술과 횟수를 헤아릴 수 없는 항암치료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노인이 되는 게 이토록 어려운 미션인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목표로 삼지 말걸 그랬나 싶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질 때면 먼저 떠난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누구보다 할머니가 되고 싶어했던 내 친구. 그녀의 몫까지 다해 꿈을 이뤄주고 싶지만, 이게 노력으로 되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수천 번, 수 만 번 을 생각해봐도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바꿨습니다. 일단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잘 살아내보자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낸 오늘들이 모이면 어느 날 할머니가 되는 기적도 찾아오지 않을까요?


잠이 오지 않는 밤, 먼저 떠난 그녀를 떠올리다 불현듯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할머니가 되고 싶은 꿈’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이 글이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가 되기를 꿈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희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첫번 째 글을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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