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눈이 일찍 떠졌다. 부쩍 쌀쌀하진 날씨 때문인지 따뜻한 마실거리가 절실했다. 커피메이커에 물을 올려놓고 방에 돌아와보니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서 카톡이 와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대.” 혹시 어디서 가짜뉴스라도 들었을까봐 급하게 한림원 홈페이지를 뒤져봤다. 2024년 노벨문학상, 한강(Nobelpriset i litteratur år 2024: Han Kang)이라고 대문 페이지에 걸려있다. 잠시나마 어머니를 어리숙한 노인으로 취급했음에 죄송했고, 한국에서도 드디어 노벨문학상 작가가 탄생했음에 기뻤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를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어 “한강은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며, 작품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 평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소설은 작가의 2014년작 <소년이 온다>라고 생각한다.
5월의 광주를 정면으로 다룬 이 소설은 독특한 방식으로 광주를 기록한다. 기존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르포 형식을 빌려 온 것과 달리 작가는 사망자들에게 빙의하는 방식을 택한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주인공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전개하는 군상극 유형이다.
소설은 그 시절 도청에 남기를 택했던 이들의 심연과 그들을 뒤로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을 드러냄으로써 처절한 분노를 차갑게 그려낸다. 국민학교 동창을 계엄군의 총탄에 잃고, 전남도청에서 시신을 염하는 일을 맡다가 최후를 맞은 10대 소년 동호, 유령이 된 정대, 불온 서적을 찍어내는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경찰에 잡힌 뒤 끝내 살아남아 치욕을 느끼며 살아가는 은숙, 시민군 김진수의 죽음에 대해 증언해줄 것을 부탁받은 1990년의 나 등 다양한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 장 다음에 이어지는 에필로그는 광주가 고향인 한강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작가는 1970년생으로 5.18 당시 초등학생이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시기에는 서울로 이사를 간 상태여서 광주의 참상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극중 동호는 중흥동 집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 작가의 아버지 한승원 소설가의 제자이기도 했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p.102
영어권 번역서는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가 또 맡았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묘사는 '금남로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는 대목이었다고 한다. 분수를 끄는 것과 추모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외국인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까닭이다. 한국에서는 분수가 화려함과 축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반면 영미권에서는 정원이나 공공장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물이다. 책에 나온 분수대 이야기는 실제로 80년 6월에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학생이 도청 민원실에 금남로 분수대의 분수를 꺼달라고 건의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진정한 어른이란 권리와 대접을 바라기보다 책임과 포용을 베푸는 존재라고 정의할 때 한강 작가의 소설은 시대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어른의 역할을 곱씹기에 훌륭한 사료가 된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은 뒤 한강 작가는 이 소설보다 <소년이 온다>가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고 애정을 드러냈다. 그만큼 작가 자신도 많은 애착과 정성을 기울인 역작이라는 뜻이다.
이제 우리도 노벨문학상 작품을 번역서가 아닌 한글 원서로 읽을 수 있게 됐다. 자긍심과 책임감이 샘솟는다. 한국어로 말하고 쓰는 모든 이들이 나처럼 기뻐할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소멸될 위기에 처했던 언어가 독립 백여 년만에 세계문학 정상에 당당히 오르다니. 세계시민의 언어가 된 한국문학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