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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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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접한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이 19년 넘게 매월 100권 이상 팔리며 교보문고 최장기 스테디셀러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한국어판을 낸 민음사에 따르면 2022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7천만 부가 팔렸다. 1등이라는 숫자보다 더 눈길이 간 대목은 20년이다. 분명 반짝 인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작품에는 저력이 있다. 이참에 고전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미국 작가 J.D. 샐린저의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사립학교의 문제아 홀든 콜필드가 퇴학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간의 일을 담은 작품이다. 1950년대 미국 십대의 삶과 언어를 담은 이 소설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계속 읽히는 명작으로 남았다.


이 소설은 샐린저의 자전적 성장소설로 작가에 대해 알고 읽으면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다. 1919년 뉴욕에서 태어난 샐린저는 미 육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하는데 그곳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한 작가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된다. 이 충격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줬다.


샐린저는 1951년 <호밀밭의 파수꾼>을 내고 젊은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데, 이후 철저히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언론 인터뷰나 공개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론과 팬들의 관심이 뜨거웠지만 그는 은둔한 채 글쓰기에만 몰두한다. 1965년 이후부터는 공식적으로는 새로운 작품 발표를 중단하고 뉴햄프셔에 은둔하며 글을 썼으나 거의 모든 출판을 거절했다.


세상과 단절한 이유는 “글은 독자의 것이고, 작가는 글 속에만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자신은 오로지 작품으로만 존재하며 사생활에 대한 해석이나 소비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다른 소설과 달리 이 소설 표지에 아무런 인물 그림 없이 제목만 적힌 것도 같은 이유다. 책날개에 작가 약력조차 생략했다.


작가의 이런 성향은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 콜필드과 닮아 있다. 16세 소년 홀든은 여러 호텔, 바, 클럽 등을 전전하며 술을 마시고, 사람들을 만난다. 그는 성적 호기심과 외로움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점점 더 외로워진다. 세상의 위선과 가식이 견디기 어려웠다. 어른들이 하는 말, 행동, 심지어 교육제도마저 그에게는 거짓과 위선으로 보인다. 거친 말투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 홀든의 모습은 마치 혹독한 중2병을 겪고 있는 소년 같다.


하지만 그런 홀든 역시 자신이 혐오하는 이들과 닮아있다.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고 쉽게 화를 내기도 한다. 이런 모순적인 태도는 오히려 홀든의 순수한 내면을 부각시킨다. 세상을 향해 분노하지만 내면은 상처로 얼룩진 연약한 아이였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동생 피비. 소설 제목인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이 피비에게 털어놓은 꿈에서 비롯됐는데, 아이들이 절벽에 떨어지지 않도록 호밀밭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것은 세상의 부조리와 위선으로부터 순수를 지켜내고 싶은 홀든의 열망을 나타낸다. 다른 의미로는 순수한 대한 집착,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슬픔을 보여준다.


소설은 질풍노도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소년의 방황을 다룬 성장 소설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거쳐온 터널, 어른이 되는 과정의 불편함을 깊이 있게 조명한다. 사람에게 상처입고, 세상에 속고, 옮고 그름에 혼란스러워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 모두는 한때 홀든 콜필드였다.


뚜렷한 서사 없이 오로지 홀든의 시선과 감정에만 집중해 이야기가 흘러가는데도 몰입감이 높은 이유는 그가 겪은 내면 불안이 누구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몰래카메라를 들이대는 것 같고, 트루먼쇼 주인공처럼 느껴질 때 홀든처럼 세상에 등을 돌리고 싶어진다.


결말은 홀든이 정신요양시설에서 치료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동생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회상하며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만은 지킬 수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과 어른을 향한 홀든의 냉소적인 시선은 자기보호본능으로 세상에서 멀어진 샐린저의 자화상인 동시에 여전히 어린 시절 순수함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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