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테 Mar 27. 2021

너에게는 이 길이 생존이겠구나.

산티아고 순례길 Day10 (비아나 → 나바레떼)


떠오르고 성장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 눈부심이다.


오늘은 아침 7시에 길을 나섰다.

한국인 아저씨 두 분과 알베르게 주방에서 마침 마주쳤고 셋이서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두 분은 선후배 사이라고 하셨다.

다음 마을인 로그로뇨까지는 11.7km.

다소 긴 여정이 될 것 같다.

항상 혼자 출발했던 터라, 셋이서 비추는 손전등의 빛이 몇 배는 더 밝게 비쳤다. 곱하기 3이 아니라 곱하기 5인 느낌이랄까. 빛나는 것들이 모이면 그 밝음이 더 커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언제 찍었는지도 모를 사진이 찍혀있었다. NG가 난 사진인데 괜히 지우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의미 없이 찍힌 이 사진이 그냥 오늘의 내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아서.

미리 써보건대, 오늘 너무 지치고 힘든 하루였다.


1시간을 넘게 걸으면서 후배 아저씨의 말동무가 되어드렸다. 딸내미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셨고 으레 그렇듯 따님의 칭찬을 해드렸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식의 칭찬을 곧 자신의 칭찬이라 여기며 살아가니까.


물론 그분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드렸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모든 대화는 진심이 기본이니까.


다만 살짝 진부하게 느껴졌다. 왜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없을까.

내가 이 길을 왜 걷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고 무엇을 깨달으며 걷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마음이 드는지.


이 길에서 만난 사람은 아저씨인데, 아저씨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분의 따님에 대해서만 잔뜩 알게 되었고, 솔직히 말해 서로에게 영양가가 없는 대화인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일상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가 담긴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를 해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부모와 자식이 어떻고, 애인과 배우자가 어떠하며 자신의 친구들은 어떠한지, 주변 사람들이 뭘 어쨌고, 연예인이 어쩌고 저쩌고.


정작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이야기할 수 있는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나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타인들의 것이 아닌 내가 가진 나만의 가치와 경험은 얼마나 될까.


굳이 거창할 것도 없이 심플하고도 가볍게 그런 것들을 표현할 수는 없는 걸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거창해지고 무거워져,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자신에 대해 초라하게 여기거나 그 마저도 인지하지 못하기에 할 이야기가 없는 거거나. 20대의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기 꺼려했던 것처럼.



오늘도 어느 순간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또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무파사와 심바(라이온 킹 영화)가 저 멀리 걸어 나올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동시에 라이온 킹 ost가 저절로 내 귀에서 흘러나왔다.


이 순간에 사자가 되어 이 초원 위를 어슬렁거리다 뛰어 댕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너무 웃긴가?

(ㅋㅋㅋㅋㅋ)

오늘은 다리를 건너는 일이 꽤 많았다.

오늘의 첫 번째 다리. 

이유는 모르겠으나 '첫 번째', '1'이라는 것에 매번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이란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따진다면, 매일매일이 소중한 것일 텐데 우리는 참 많은 걸 잊고 사는 것 같다. 오늘 나의 하루도 그랬고.

다음 마을인 로그로뇨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문득 조개 모양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벌써 이 순례길 여정도 10일 차에 접어들었고 40일 여정의 4분의 1이 지나가고 있구나.

그동안 나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Buen Camino!! 부엔 까미노

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낙서들을 참 많이 본다.

대부분의 낙서들은 외국어기에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오늘은 부엔 까미노-라는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좋은 길, 좋은 여행, 좋은 방법."

나는 이 3가지를 다 즐기며 걸어가고 있을까?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부엔 까미노이기를.

1시간이 지난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셋 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선배 아저씨

후배 아저씨


서로 간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며 자연스럽게 각자의 속도대로 걷는다. 발걸음조차도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데 뭘 그리 모두가 같은 속도를 맞추려고 하는 걸까.


20대는 뭘 해야 하고,

30대는 뭘 해야 하고,

40대는 뭘 해야 하고.


정말 부질없구나.

그렇게 뒤를 돌아보는데 해가 아직 걸쳐져 있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다.


떠오르고 성장하는 것들은 더 눈부시구나.

지금의 내 나이 대에 뭘 해놔서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속도대로 매일 성장해나가는 모습이 곧 눈부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눈부신 사람이 되고 싶다.



너에게는 이 길이 생존이겠구나.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고, 순간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찌릿함을 느꼈다.


사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오른쪽 발볼이 아팠는데, 늘 있는 일이라 (발볼이 상당히 넓어서 통증을 달고 산다.) 평소보다 조금 더 아픈 것에 그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금 더 신경 쓸걸, 하는 마음이 그제야 들었다. 괜찮겠지- 싶었는데 결국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고, 몇 분 못가 등산화에서 크록스 샌들로 바꿔신게 되었다.


참, 인간은 미련해. 꼭 잃고 나서야 후회하며 소중함을 깨달아. 몸은 이미 신호를 계속 주고 있었는데 발볼의 통증을 간과하며 무시했고, 결국 아킬레스건에 무리가 생겼다.

하아, 어쩌지-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었는데 저게 뭐람 ㅋㅋㅋㅋㅋㅋㅋㅋ

등산화가 저기에 왜 걸려있다니?


걷는 것에 신물이 난 누군가가 저리 던져놓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앗, 이건 지금 내 속마음인가. ㅇㅇ 빙고.

로그로뇨에 도착했고 로그로뇨는 큰 도시였다.

순례길을 처음 걷기 시작하며 시골스런 풍경에 참 설레었는데, 10일 만에 큰 도시에 설렌다.

10일 동안 수많은 성당을 보면서도 지나쳤는데 문득 들어가 보고 싶어 졌다.

과자가 놓여있길래 하나 집어 들며 둘러보았고

미사를 드린다던 두 분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았다.

기도를 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뭉클해졌다.  어떤 기도를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응원하는 마음을 보내며 먼저 성당을 나왔다.

온몸에 쎄요(도장)가 가득한 벽화가 신기해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다리를 만났다.

밑에는 기찻길.

그렇게 길을 건너니 공원이다.

문득, 산책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일상 속 여유로움이 부러웠던 것 같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또 울컥 올라온다.


오늘 아침에 출발하면서 깨끗한 내 발바닥을 보며 자신만만했다. 다른 이들은 다들 발에 물집을 한 두 개씩 달고 있는데, 말랑말랑 부드러운 내 발을 보면서, 심지어 이제는 가방마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며 흐뭇해했는데.


자만과 오만의 결과인 것 마냥 느껴졌다.

진짜 아프다. 아프다고 자각한 이후로 급격하게 지침이 밀려들었다.

그러다 기아 KIA를 보게 되었는데 아니 이게 뭐라고 반가워?

한국인은 한국인이네!


문득 고향 생각이 나면서 엄마표 밥이 먹고 싶어 진다. 이 정도 되니, 아킬레스건이 꽤나 아프고 걱정되긴 한가보다.

로그로뇨 마을을 지나치자 마치 서울의 한강공원 같은 느낌의 산책로가 쭈욱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산책도 하고 조깅도 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지나간다.


아, 이런.

다시금 이들의 여유와 가벼움이 너무 부럽다.


왜 같은 길을 걸어가는데, 저들은 저렇게 여유로워 보일까. 왜 저렇게 쉬워 보일까.

문득 나 혼자 동떨어진 순례자 같았다.


20대 동안에 항상 그들이 부러웠다.

나보다 언제나 쉽게 가는 것 같았고, 가벼워 보였고, 함께 그들끼리 사라져 갔다.


나는 그 길이 너무 힘들었고 무겁고 아팠는데. 어려웠는데. 나는 왜 여기까지 와서도 이러고 있나 싶은 마음에 울컥하고 눈물이 났다.


언제쯤이면 내 발걸음이 가벼워질까 싶어서.

그렇게 절뚝이며 가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지나가더니 길을 건너 건너편 나무로 올라간다.


'아... 너에게는 이 길이 생존이겠구나.'


그래. 모두가 각자 다른 테마로 이 길에서 만난 것뿐이지. 나는 순례자로 이 길에서 그들을 만난 것이니 내가 짊어진 짐도, 발걸음도 그들과 다를 수밖에. 하지만 깨달음의 폭도 다르겠지. 내가 얻어가려고만 한다면.

이 길에서의 나는 이런 모습이다.

내가 선택한 내 모습.

벤치에 잠시 앉아 쉴 겸 발목에 약을 바르고 파스를 붙이고 소염제를 먹었다.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 계속 아프면 어쩌지. 점점 더 심해지면 어쩌지.'

두려움이 엄습한다.


'어제만 해도 잘만 걸어 다녔는데. 아니 아까 전만 해도 잘만 걸어 다녔는데...'


문득 이제야 진짜 순례자 같은 느낌이 든다.

절뚝이며 걸어가는 내 처지가.


'이 고비를 또 어떻게 넘기지?'



멈추고 싶지 않아. 무조건 GO!


아픈 김에 점심을 사 먹으며 좀 오래 쉬어보기로 했다. 마침 옆에 레스토랑이 보이길래 곧장 걸어갔고, 뜻밖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러려고 아팠나?ㅎㅎㅎ'


내추럴 오렌지 주스를 시켰는데, 그 자리에서 오렌지들을 갈아서 주었다. 그냥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과일들이 생각났다. 바나나, 딸기, 망고, 복숭아, 멜론 등등.

쎄요(순례자 스탬프)를 찍어달라고 요청해서 받았는데, 아 쎄요까지 너무 예쁘다 여기.

하트 모양의 쎄요라니!

풍경도 잘 눈에 안 들어왔다.

아프니,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라게 된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발목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최악의 상상을 해본다. 앞으로 통증이 더 심해진다고, 오늘 당장 걷지 못할 것 같아진다고.


'몰라. 저녁 안에는 도착하겠지. 지금처럼 걸으면 무리는 많이 안 갈 거야.'


일단 마음을 비워보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의 내 걸음으로는 1시간은 더 걸어야 할 것 같은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런 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스탑과 화살표 표시가 동시에 있다.


멈추고 싶지 않아.

망설임 없이 무조건 고지, GO!


오늘의 마지막 다리.

마을이 코 앞에 보인다.


그래, 오늘도 결국 무사히 건너왔네.

나바레떼

아.. 드디어 도착.


총 8시간, 19km

Navarrete 나바ㄹ레떼


오후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어제 비슷한 거리를 4시간 반 만에 도착했던 걸 생각하면 두배쯤 걸렸다.


마을의 가장 첫 번째 알베르게에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첫 번째, 두 번째 알베르게를 지나쳐 언덕길을 좀 더 올라갔다. 내일 조금이라도 덜 걷기 위해. 조금 덜 힘들기 위해.


내일은 늦게까지 늦장 부리다가 제일 마지막인 8시에 나와야지. 나와서 최대한 아침 사 먹으며 빈둥거리다가 아주아주 쪼그만 걸어야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꼭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해주어야지. 수고 많았다고, 고맙다고.

이렇게 부려먹으면서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음에 뒤늦은 반성을 해본다.

크리덴시알(순례자 여권)의 첫 페이지가 어느새 다 채워졌다. 알록달록한 것이 참 예쁘다.


모든 페이지를 알록달록 꽉 채워서 돌아가야지.

파이팅.



2019.10.10.

비아나 → 나바레떼

총 19km/8시간


트래블희 ᵀᴿᴬⱽᴱᴸᴴᴱᴱ


매거진의 이전글 BE REAL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