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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열두 달-귀촌 12년의 기록을 시작하며

돌아보니 어느덧 12년 차 귀촌인

잠시 멈춰 생각해 보니 내가 구례에 내려온 지도 어느덧 12년이 되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의 이주는 지금 돌아봐도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늘 귀촌을 꿈꾸면서 기웃거리기는 하지면 차마 시도를 못하고 있는데 참 용감하세요!!”


그동안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다.


“용감해서겠어요. 절실해서겠지요!”


나의 대답은 늘 한결같이 절실함을 이야기했다. 12년 전 나는 무엇이 그렇게 절실해서 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결정했을까! 12년 동안 그 절실함을 나는 어떻게 풀어내며 살았을까! 나도 그때의 절실함을 다시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구례 열두 달-귀촌 12년의 기록’을 시작하려고 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사대문 안에서 학교를 다니고, 그 주변에서 직장을 다녔다. 남편은 용인에서 태어나 지금도 부모 형제가 용인에 살고 있는 토박이 용인사람이다. 그런 우리에게 연고가 없는 지리산 아래 구례로의 이주는 용기 그 이상이 필요했다. 부모님이 계신 양지에서 전원생활이 가능했지만 우리 부부가 원했던 것은 전원생활이 아니라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의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실함으로 무장한 우리가 이른 아침 시작해 저녁 늦게 끝나는 일상을 40대 중반이 넘은 나이까지 살아도 나머지의 내 인생이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무력감이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애를 쓰며 살아야 하는 거지?”


라는 물음에 답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을 바꾸고 싶었고,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도시를 떠나며 각자의 바람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도 같다.


“나는 적게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봉사하고 기도하며 살고 싶어!”


매우 종교적인 남편의 바람이었다, 남편인 공 선생은 구례에서 정착하며 좌충우돌 부딪히고 때로는 상처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며 본인만의 중심을 잡아가며 살아가는 중에 있다.


“나는 나만의 색깔로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어!”


나의 바람은 나의 호기심만큼 많은 일들을 만들어 내고, 일에 치어 사는 일중독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위안이라면 나만의 색깔의 카페를 운영했고, 지금은 나만의 색깔로 꾸며진 공간인 스테이 섬진강댁에서 여행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으니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은 내 바람은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12년간의 구례살이는 바람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하며 성장해 온 시간이었다.

‘구례 열두 달-귀촌 12년의 기록’은 귀촌을 준비했던 2013년 9월부터 2025년 지금까지 그 한해 한해 고민하고, 행동하며 좌충우돌 성장해 온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살 집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보증금 100만 원에 15만 원 방한칸 월세집을 빌려 30평 아파트의 짐을 싣고 무작정 내려오던 무모함부터 시골집을 사서 10년 동안 3차례의 리모델링을 통해 지금의 스테이 섬진강댁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 농사를 짓지 않고 살겠다고 다짐했던 남편 공 선생이 호기롭게 만 오천 평 고사리밭을 빌려 고생하며 농사를 지었던 웃지 못할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한다.


“이 시골 구석에 카페를 차리겠다고 하는 사람은 고수이거나 바보인 거야!”


구례 사람들도 시골이라고 말하는 작은 면단위 약방에서 7년 동안 카페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던 섬진강댁의 탄생이야기, 코로나 시기 시골집을 에어비앤비로 운영 17분기 슈퍼호스트를 유지하고 있는 이야기.

가지고 내려온 돈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길을 찾은 우리 두 부부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이 이야기가 나에게는 지난 12년을 정리하는 기회가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꿈으로 남아있는 시골살이의 작은 용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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