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ntom thread, 2018
영화는 알마(비키 크리엡스 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레이놀즈(대니얼 데이 루이스 분)는 내 꿈을 이뤄줬어요. 대신 나는 그가 열망하는 걸 주었죠
알마의 살짝 수줍은 듯한 얼굴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투는 자연스레 궁금증을 유발한다. 레이놀즈가 이루어준 알마의 꿈은 무엇이며, 알마는 레이놀즈의 어떤 열망을 충족시켜줬을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녀는 마치 준 만큼 받았다는 식으로 당당히 미소 지으며 말하는 걸까. 기브&테이크의 경제적 관계인 듯한 레이놀즈와 알마는 진정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영화를 여는 알마의 대사는 영화의 마무리에 가서 비로소 온전히 이해된다. 레이놀즈와 알마는 꿈을 이뤄주고 열망하는 것을 주고받는 관계다. 영화는 주고받는 레이놀즈와 알마의 상하 관계의 변화와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둘 사이의 끊임없는 권력 다툼과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사랑 같은 사랑 이야기다.
레이놀즈는 1950년 대 런던의 유명 의상실 우드콕의 드레스 디자이너다. 출근을 위해 옷을 입고, 단장하는 모습에서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완벽주의, 결벽증이 느껴진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버터 바르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는 전형적인 천재형 예술가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어머니에 대한 태도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드레스 속에 넣어 만들거나,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알마에게 "어머니를 닮았나요? 어머니 사진을 갖고 다니세요. 늘 어머니를 간직하세요. 저도 늘 어머니를 생각하며 살거든요"라고 알 수 없는 말들을 한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되었음에도 아직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말들이다.
알마는 어리지만 당차고 할 말은 하는 여성이다. 레이놀즈와의 첫 만남에서도 수십 살이 더 많아 보이는 레이놀즈 앞에서 결코 주눅 들거나 눌리지 않는다.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레이놀즈와 함께 그의 집에 가서 그가 원하는 대로 드레스를 입지만, 마네킹처럼 수동적으로 옷만 입지 않는다. 똑바로 서 있으라는 레이놀즈의 말에 "어떻게요? 진작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요?"라고 대꾸하듯 꿋꿋이 할 말을 다 한다. 레이놀즈의 뮤즈로서 함께 살게 된 이후에도 그의 과거 뮤즈와는 달리 인형 같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 레이놀즈를 두고 벌이는 그의 누이 시릴(레슬리 맨빌 분) 과의 신경전에서도 알마는 절대 움츠러들지 않는다.
엄마를 향한 유아기적 사랑에 머물러 있는 완벽주의 예술가 레이놀즈와 이방 땅에서도 기어코 당차게 살아남을 어린 알마의 만남. 좀처럼 쉽게 예상하기 어려운 사랑 이야기다. 아니다 다를까 둘은 끔찍한 관계를 이어간다.
첫눈에 반하는 대상 - 최고의 드레스의 모델 - 모델이자 도구
레이놀즈는 알마를 호감의 대상에서 점차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대상화한다. 어느새 알마는 그저 레이놀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런웨이에 서는 모델이 된다. 그런 알마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은 그가 완전히 무기력해질 때다. 녹초가 된 피곤한 몸으로 운전하기 힘든 레이놀즈를 위해 기꺼이 운전석에 앉는 알마는 순간 느꼈다.
이후 알마는 그 충만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알마가 음식에 갈아 넣은 독버섯 가루로 인해 레이놀즈는 죽기 직전까지 아파한다. 역설적으로 그 무기력함으로 인해 알마는 레이놀즈를 자신의 아이와 같이 손에 넣을 수 있게 되고, 레이놀즈도 알마를 도구가 아닌 '엄마'와 같이 온전히 의지하는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둘은 끔찍한 사랑의 권력 투쟁을 시작한다. 독버섯을 따러 가는 알마의 모습에는 소름 끼치는 잔인함과 동시에 비장함이 있다. 사랑하는 상대를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파괴하는 아이러니한 알마의 사랑. 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식사 습관마저도 철저히 다른 상대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열망하는 '엄마' 품으로 갈 수 있기에 다시 무기력의 길을 선택하는 레이놀즈.
레이놀즈가 이뤄 준 알마의 꿈은 결국 '레이놀즈' 자체였다. 그가 자신을 온전히 알마에게 내어 주고, 굴복할 때 비로소 알마는 레이놀즈를 얻을 수 있었다. 반대로 알마가 레이놀즈에게 준 것은 '엄마'였다. 드레스 속에 엄마의 분신을 넣고, 엄마의 환영을 보는 레이놀즈에게 알마는 살아 있는 '엄마'였다. 결국 알마의 꿈인 '레이놀즈'와 레이놀즈의 열망인 '엄마'는 서로 교환되었고, 레이놀즈의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내어 주고, '엄마'를 얻었다.
어쩌면 레이놀즈는 자신의 완벽함을 무너뜨려줄 수 있는 엄마의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에게도 그런 파괴적 사랑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다. 나의 철옹성 같은 기준과 삶을 무너뜨려줄 존재를 기다린다. 그것이 백마 탄 왕자님이든, 사디스트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재의 무기력과 권태와 일상을 깨어줄 상대를 기다리고 동경한다. 사도마조히즘이라는 극단적인 파괴적 사랑이 지배하는 영화임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공감이 되었던 것은 나에게도 그런 끔찍한 사랑의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내 사랑이 널 완성할 거야
누군가의 사랑이 날 완성시켜준다면 쓰디쓴 독버섯도 죽지 않을 만큼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순간 등골이 왠지 서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