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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나니 찰리 Sep 19. 2019

베일 벗는 살인의 추억, 그리고...

영구 미제사건을 다룬 영화들

[쉽게 읽는 서브컬처-74]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밝혀졌다. 1986년 첫 번째 사건이 발생한 지 33년 만이다. 지난 18일 경찰은 살인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 분석을 통해 현재 수감 중인 50대 남성을 용의자로 특정해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범죄사(史)의 대표적인 미제 사건이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밝혀지면서,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살인의 추억'뿐만이 아니다. 피해자만 남기고 가해자는 홀연히 사라진 최악의 범죄들은 종종 영화로 다시 태어났다. 실제 사건을 충실히 재현한 작품도 있고, 상상력을 보태 영화적인 매력을 더한 작품도 있다. 하지만 어떤 영화든 그 근간에는 '범인을 잡고 싶다' '범인이 궁금하다'는 사람들 염원이 담겨 있다. 공소시효가 지난 영구 미제사건을 다룬 영화들에 대해 알아보자.

☞아이들…(이규만 감독, 2011)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
1991년 대구에서 발생한 국민학생 실종사건 일명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해당 사건은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5명이 와룡산으로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갔다가 동반 실종된 이래 세간의 관심을 끈 실종 사건이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군인과 경찰이 총동원됐으며 영상 및 인쇄 광고를 통해 전 국민이 개구리 소년 찾기에 동참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아이들을 찾지는 못했다. 실종 11년째인 2002년에 와룡산 중턱에서 5명의 유골이 발견되고, 이들의 유골에서 타살 흔적이 발견되면서 실종 사건은 살인 사건으로 바뀌게 된다.


영화는 개구리 소년의 부모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던 사이비 심리학자의 책을 원작으로 삼았다. 하지만 정작 작품은 심리학자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사건의 진행 과정과 유족의 슬픔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방송국 PD인 주인공이 용의자를 추적해 격투를 벌이는 장면 등은 픽션이다. 영화 개봉 즈음 언론과 인터뷰한 개구리 소년 부모들은 밝혀지지 않은 범인을 향해 "이제 처벌도, 원망도, 이유도 묻지 않을 테니 어린애들을 왜 죽여야만 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려만 달라는 애끓는 외침이었다.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 2003) '화성 연쇄살인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일대에서 발생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사건이자, 대한민국 범죄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 연 인원 180만명의 경찰이 투입됐고 3000여 명의 용의자가 수사 선상에 올랐을 정도로 이례적인 수사를 벌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총 10건 살인 사건 중 8건의 사건과 2건의 모방범죄 모두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난 18일 용의자가 특정되면서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 '기생충'으로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발돋움한 봉준호 감독을 대중에 각인시킨 작품은 바로 '살인의 추억'이었다. 2003년 개봉해 관객 525만명을 사로잡은 흥행작이자 한국 영화계를 되짚어 볼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걸작이다. 특히 봉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주연 배우인 송강호가 카메라를 응시하게끔 연출한 것에 대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온 범인과 마주보길 의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영화 개봉 10주년 행사에서도 "이 행사에 범인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50대 남성이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인 것을 생각하면 봉 감독의 추리는 틀린 셈이다. 반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유영철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에 대해 '이미 죽었거나 다른 범죄로 교도소에 수감 중일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2012년에 개봉한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공소시효가 지난 후 범행을 고백하고, 자서전을 출간한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영화다. 일본에서 '22년 후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됐다.

☞그놈 목소리(박진표 감독, 2007)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
1991년 서울에 살던 국민학교 3학년생 이형호 군이 유괴돼 시체로 발견된 미제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다. 범인은 유괴 이후 아이 부모에게 44일 동안 60여 차례나 협박전화를 하며 몸값을 요구했다. 거듭된 수사 혼선과 검거 작전 실패로 결국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이형호 군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발견된 시신을 부검한 결과 유괴 당일에 살해된 것으로 밝혀져 더욱 공분을 샀다.


연출을 맡은 박진표 감독은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조연출로 활동하면서 해당 사건을 직접 취재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화는 스릴러 영화의 장르적 재미보다는 실화에 근거해 피해자의 분노와 슬픔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박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법적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부모의 공소시효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해자 부모의 직업 등은 모두 바꿨다. 영화의 마지막엔 수배지와 함께 실제 범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영화 속에서 범인의 목소리는 강동원이 연기했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공범'(국동석 감독) 역시 이형호 유괴살인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만든 영화다. 이 영화로 입봉한 국동석 감독은 '그놈 목소리'에서 각색과 조감독을 맡은 바 있다. 우연히 듣게 된 과거 살인 사건범의 목소리가 자신의 아버지와 매우 닮은 것을 알아챈 딸이 의심을 품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프롬 헬(앨버트 휴즈·앨런 휴즈 감독, 2001) '잭 더 리퍼'
1888년부터 영국 런던에서 매춘부 5명이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 일명 '잭 더 리퍼'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만화작가 앨런 무어의 동명 원작 만화를 원작으로 삼았다. 100년이 넘도록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잭 더 리퍼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다양한 인물들이 용의자 물망에 올랐다. 피해자의 장기를 적출해 가는 엽기적인 방식 때문에 '해부학적 지식을 지닌 외과의'가 범인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고, 작가 루이스 캐럴도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인 앨버트 왕자가 범인 혹은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프롬 헬은 앨버트 왕자의 잘못을 덮기 위해 윌리엄 위시 걸이 왕실의 명령을 받고 잭 더 리퍼로 암약(?)한다는 설정을 그린다.


아쉽게도 조니 뎁 주연의 영화는 원작 만화의 방대한 설정과 은유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디악(데이빗 핀처 감독, 2007) '조디악 킬러'
조디악 킬러는 196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한 연쇄살인범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한 이 살인마는 언론사에 여러 차례 보냈던 편지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편지는 '조디악 가라사대(This is the Zodiac speaking)'라는 말로 시작했으며, 복잡한 암호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신문 1면에 자신의 편지를 실지 않으면 주말 밤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 불리는 이 영화는 지역신문 삽화가(제이크 질런홀)와 기자(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형사(마크 러펄로)가 조디악의 실체를 추적하며 각자 인생이 꼬이고 망가져가는 모습을 담담하고 우직하게 그려낸다. 흥행은 실패했지만 거장다운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


☞현재진행형인 비극이 주는 묵직함
영구 미제사건(未濟事件·Cold Case)의 다른 말은 완전범죄다. 범인은 끝끝내 잡히지 않았고, 만약 잡히더라도 법에 의한 처벌은 기대할 수 없다. 영구 미제사건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이 사회의 불신과 비극 역시 그만큼 더 커진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무결'은 없다. 완벽한 범죄일지라도,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있다면 작은 실마리라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밥은 먹고 다니냐"며 카메라를 응시하던 송강호의 그 눈빛이 16년 걸려 현실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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