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재영 Oct 26. 2022

있어 보이는 비밀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9

여기까지 모두 읽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대관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직장생활과 배변, 성교, 도살, 범죄가 도대체 무슨 연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다. 하다 못해 일한 만큼은 인정받고 싶다. 그뿐이다. 아무리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라 우리를 추켜세워도, 우리는 어쨌거나 철학자가 아니라 직장인이다. 골치 아픈 문제들은 철학자에게 맡기고 우리는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 철학적인 생각에 심취할 시간에 업무능력을 올릴 궁리를 해야 한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재테크 공부를 해야 한다. 돈 버는 비밀을 알아야 한다.


맞는 말씀이다. 우리는 아무리 스스로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라 불러도, 철학에 심취한 직장인일 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라 직장인이다. 밥벌이를 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우리는 철학적인 생각도 해보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반드시 경험하는 현상이 있다. 바로 만물이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과 ’ 실제로 그러한 본질’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가방도 겉모습만 따라한 짝퉁 가방과 실제 장인이 만든 명품가방으로 나뉘고, 직장인도 말만 번지르르한 말꾼과 실제로 일하는 일꾼으로 나뉜다.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이 문제를 두고 고민을 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모습과 본질로 나뉘리라는 생각을, 인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걸까? 그건 아마도 인간이 타인을 대할 때의 자기 모습을 보면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있게 되면, 자기가 말하는 걸 누군가가 듣게 될 경우에 부끄러워할 것도 감히 입 밖에 많이 낼 것이며, 자기가 행하는 걸 누군가가 보게 되는 걸 용납하지 못할 것도 많이 할 것이라 나는 생각하네.” (Platon 604a)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본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속속들이 본다. 우리는 타인을 대하는 스스로의 겉모습과 함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속마음을 본다. 그 둘이 비슷할 때에도, 어긋날 때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본다. ‘인간의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진리와 가까운 말일지도 모른다. 겉과 속이 따로 노는 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물론 앞뒤가 다르다는 말은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말이다. 앞뒤가 다른 건 한 사람이나 몇몇 사람의 눈을 속이는 짓이지만 겉과 속은 전혀 다르다. 겉은 모두의 시선이 닿는 곳, 속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이다.


인간은 말과 짓으로 겉모습을 만든다. 명품 옷과 귀금속으로 치장한들 말투와 몸짓이 천박하면 말짱 꽝이다. 거지 꼴을 하고 있어도 숭고한 말과 고귀한 짓을 하면 성인(聖人)이 된다. 말과 짓은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말과 짓을 멈추거나 비틀면 속마음은 감추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는 초능력도 텔레파시도 없다.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무언가를 말하거나 어떤 짓을 해야만 세상에 그것을 드러낼 수 있다. 다른 인간에게 알리는 방법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말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모습을 뜻한다. 가장 기본적인 목소리를 포함해서 글, 그림, 도상, 지표, 상징 그밖에 인간이 동료 인간의 소행이라고 믿을 수 있는 모든 흔적이 곧 말이다. 짓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몸을 사용하는 모든 모습, 즉 눈짓, 손짓, 발짓, 몸짓을 비롯해 우리가 ‘-짓’이라고 말을 만들 수 있는 온갖 모습들, 예컨대 애기 짓, 선생 짓, 꼰대 짓 등등이 모두 인간의 짓이다. 인간은 말과 짓으로 타인에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한 일을 동료 인간에게 부지런히 말해야 한다. 말로 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일해야 한다. 내가 하는 짓을 보여주어야 내가 드러나고, 정치적인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이 인지도에 목숨을 건다는 말은 완벽히 옳은 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일종의 정치인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한 일을 내 입으로 말하면 무언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칭송은 다른 사람 입에서 나와야 의미 있다. 다른 사람이 내 행위를 추켜세우면 뿌듯하지만 내가 말하면 어쩐지 자랑하는 것 같고 부끄럽다. 구구절절 내 자랑을 늘어놓으면 좀스럽고 옹졸하고 구차하고 궁색하고 구질구질해 보인다. 마케팅에 아무리 큰돈을 쓴들 입소문만 못한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자기 자랑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나 속한 곳의 문화에 따라 다르게 느낄 테니까. 그러나 자기 자랑에도 정도는 있다. 자기 자랑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너무 과하면 ‘없어 보인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없어 보인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자기가 한 일을 떠벌리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굳이 자기가 한 일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모조리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인간은 어느 정도 비밀을 유지해야 ‘있어 보인다’. 비밀이 없으면 사라지고 비밀이 있으면 나타나는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돈과 명예, 지식이 아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돈, 명예, 지식, 그밖에 우리가 희소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오히려 드러내지 않을수록 더욱 명백히 드러나는 것, 비밀에 부칠수록 더 많이 알려지는 것, 보이지 않을수록 사람들의 믿음을 공고히 만드는 것,  그것은 깊이다.


비밀을 가진 인간만이 깊이를 갖는다. 무언가를 떠벌리지 않고 비밀에 부칠 때 인간은 심오해진다.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영역을 지키는 사람만이 열 길 물속보다 깊은 속을 갖게 된다. 모든 걸 다 드러내는 사람은 깊이가 얕다. 오죽하면 꼬치꼬치 캐묻거나 떠벌리는 모습을 두고 미주알고주알이라 묘사할까. 미주알은 입에서 가장 먼 항문을 일컫는다. 먼 훗날 옷차림이 아무리 개방적으로 발전한다 해도 항문을 드러내는 옷은 발명되지 않을 것이다. 항문은 언제나 속옷으로 감싸 꼭꼭 숨기는 부위로 남을 것이다. 가장 속에 있는 그런 곳까지 남김없이 들추어내는 천박한 모습이 바로 미주알고주알이다. 깊이가 얕다는 건 겉과 속 사이의 거리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겉과 속을 구분해 다르게 행위할수록 깊이는 깊어진다. 겉과 속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면 인간은 천박해 보인다.


한글로 된 티셔츠를 입은 외국인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옷을 보면 왜인지 우습다고 느낀다. 한글이라는 문자가 우스워서 한글을 새긴 옷이 우스워보이는 것은 절대 아니다. 평상복에 영어를 새길 때에도 사람들은 우습다고 했을 것이다. 글자를 옷에 새기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옷에 새긴 글자의 의미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로큰롤 문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옷에 글자를 새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1800년대 말 운동선수가 입는 저지에 팀을 상징하는 글자나 문양을 새기는 정도가 용인됐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로큰롤-히피-힙합으로 이어지는 대중문화가 유행하면서 글자 박힌 옷의 원조인 링거 셔츠(ringer shirts)가 유행했다. 관습과 어려움을 거부하고 기존에 천박하다고 여기던 것을 멋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글자를 그대로 넣는 문화를 만들었다.


2021. 12. 21. 동아일보 보도 <[대박! 이거 봤어?] 외국인들 입는 옷에 웬 재밌는 한글문구?>
2017. 09. 29. 중앙일보 보도 <아프리카 길거리에서 목격된 '문재인 지지자(?)'>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베일에 싸여 있던 것을 찾아낼 때,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들어맞을 때에는 쾌감을 느끼지만, 베일 자체가 없는 것은 오히려 아름답지 않다. 해석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무지의 미학이라 부른다. 옷에 새긴 글자는 그 옷을 입은 사람이 입을 다물어도 그를 보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떠벌리는 말이 된다. 그 말을 아는 사람은 천박함을 느끼고 모르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옷에  글자를 새기더라도 사람들이 쉬이 읽지 못하게 만드는 조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를 거친다. 한국 사회에서 영문은 충분히 독특하기 때문에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 옷을 만들 때 한글을 꺼리는 경향, 한글을 넣더라도 알아보기 힘들게 넣는 경향은, 의미를 어려움이라는 베일로 감싸 비밀의 영역으로 만들어 깊이를 더하는 행위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여기저기서 난리인 걸 보니, 머지않아 한글을 새긴 옷이 유행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다시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겉과 속이 다른 인간으로 변모해야 한다. 다시 말해, 속으로 하는 말을 겉으로 하는 말과 홀로 하는 짓을 다른 인간에게 하는 짓과 구분해야, 인간은 깊어진다. 때문에 깊은 사람의 전제조건은 사리분별과 상황 파악이다. 어떤 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무슨 짓을 해야 적절할지 아는 인간이 속 깊은 인간이다. ‘있어 보인다’는 말은 그런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편,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이의 입장을 헤아리는 모습을 두고 속이 깊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인간은 깊게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다. 생각이 깊다는 건 탁월한 추리력과 논리학 지식으로 사고를 끝까지 몰아붙인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세상은 홀로 사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인간에게만 깊은 인간, 있어 보이는 인간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깊은 인간은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인간이다. 짧은 생각으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인간은 결코 다른 이의 입장을 헤아릴 수 없다. 내가 싫으면 다른 이도 불편하겠거니, 내가 좋아하는 건 다른 이도 원하겠거니, 입장 바꿔 생각할 줄 아는 인간, 그러니까 네 글자로 역지사지할 줄 아는 인간이 생각도 속도 깊은 인간이다.


‘있어 보이는’ 인간은 그러므로 역지사지할 줄 아는 인간이다. 역지사지는 반드시 경계 짓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결코 다른 이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다른 이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것도 결국에는 상상이고 지레짐작이다. 우리가 다른 이의 입장을 헤아리려 하면 할수록 ‘나는 그가 아니다’라는 한계를 깨닫게 된다. 나와 너 사이의 경계가 요동치면서,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나의 상황과 너의 상황이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마주하면서, 너와 내가 우리로 있기 위해서는 어떤 말과 짓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너의 상황을 고려해 내가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혹은 이러이러한 짓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행에 옮길 때, 마침내 나는 나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내가 홀로 있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그런 일들을 하면서, 나는 너를 나의 하나로 믿고, 비로소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예수와 공자가 황금률이니 은률이니 말한 것도 결국에는 같은 뜻이다. 세상에 진리가 있다면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언제나 함께 산다는 것뿐이다. 생각이 깊은 인간은 그걸 안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이 한 일을 열심히 드러내야 한다. 힘써 말하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우리가 여기 이렇게 살고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다만, 드러내더라도 자기 자신의 입으로 떠벌리면 천박해 보일 뿐이다. 동료 인간이 우리가 한 일을 칭송하도록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 드러낼 것과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을 구분하면서, 그리고 적절히 비밀에 부칠 것들을 남겨두면서 깊이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심연에 가리어진 것,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이중적이다. 범죄만큼 사악하기도 하면서, 현자의 깊은 속처럼 고귀하기도 하다. 속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말과 짓, 즉 행위에 달려있다.


직장인의 철학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화 일꾼과 말꾼

2화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들에게

3화 드러난 것이 있는 것이다

4화 우리가 사는 세계

5화 사내정치를 위한 변명

6화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정치인이다

7화 보이지 않아 사라지는 것들

8화 가장 어두운 범죄

9화 있어 보이는 비밀(방금 읽은 글)

이전 08화 가장 어두운 범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