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재영 Oct 30. 2022

어떤 직장인이 될 것인가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0

지금까지 논의를 종합해보자. 우리는 타인에게 드러나기도 하고 숨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이 우리에게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나뉘겠거니 하고 상상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일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하기보다 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더 힘쓰는 말꾼 같은 사람이 있다.


이뤄낸 성과로 따진다면야 일꾼이 말꾼보다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일꾼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에서 사라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우리에게 드러난 것만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인간이라면 반드시 경험하는 현상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고 언제나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는 동료 인간의 인정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사내정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나아가 인간 자체가 정치적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우리에게 드러난 인간들이다. 우리가 그를 잊으면 그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드러나지 않은 것은 죽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타인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배변, 성교, 도살, 범죄처럼 타인에게 드러났을 때 수치스러운 것들이 있다. 인간은 타인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면서도 자신에 관한 무언가를 적절히 감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천박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와 교양, 예절은 일종의 위선이다. 숨기면서도 드러내고,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게 인간관계의 요체다.


무엇을 기준으로 드러내고 감추어야 하는가? 이건 산수 문제 답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명의 사람이 있다면   답이 있다. 그렇다고 판단 기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 같은 판단을 내놓더라도 상황과 상대방을 상상하고 내린 판단이냐 아니냐가 판단의 질적 차이를 만든다. 역지사지하라는 옛말이, 기소불욕 물시어인 하라는 은률이,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는 황금률이 아직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직장인이 될 것인가? 이 질문은 다음 질문과 맞닿아 있다.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생각 없이 밥벌이만 하려는 사람에게는 이런 고민이 불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삶이 밥벌이 이상의 무언가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평생을 돈만 벌다 죽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반드시 이 고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꽤나 오랜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다. 특히 하루를 두고 보나 인생 전반을 따지고 보나 우리 삶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를 직장에서 보낸다. 때로는 가족보다 친구보다 직장 동료를 더 오래 본다. 적어도 깨어있는 동안에는 나를 위해 쓰는 시간보다 회사의 번영을 위해 쓰는 시간이 더 많다. 우리에게는 취미생활을 하는 누구, 가족 구성원 중 하나로서 누구라는 정체성보다 일터에서 일하는 자로서 누구의 정체성이 훨씬 진하다. 그러므로 어떤 직장인이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은 어떤 인간이 되느냐 하는 질문과 아주 밀접하다. 좋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좋은 삶을 사는 것과 깊은 연관을 맺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 ‘대퇴사의 시대(The Great Resignation)’라느니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라느니 말들이 많다. 전염병이 지구를 휩쓸고 난 뒤 자발적 퇴사 건수와 실업인구의 숫자가 통계적으로 눈에 띄게 늘었다. 사실 이건 예견된 현상이었다. 이전부터 이미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직장인 아닌 나의 정체성을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는 말이 인기를 끌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워라밸’은 일과 삶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서 정체성을 구분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여기까지는 일하는 나고, 여기부터는 일하지 않는 나야.’ 대퇴사의 시대나 조용한 사직은 일이 그 선을 넘어 삶을 침범했을 때, 일을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며 모종의 벌을 주는 것이다. 단지 문을 박차고 나가느냐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기만 할 뿐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핵심은 인정이다. 인간의 존재는 동료 인간의 행위에 의존한다. 동료 인간의 환대가 없는 행위는 공허하다. 예컨대 어느 식당에 들어가 빈 테이블에 앉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문을 받지도, 반찬을 내오지도 않는 주인을 떠올려보자. 주인을 불러도 답이 없고, 나는 덩그러니 테이블에 앉아 있다. 혹시 주인의 심기를 건드릴 짓을 한 건 아닌가 되짚어봐도 내 주문을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애를 써도 손님이 찾지 않는 식당 역시 마찬가지다. 식당이나 손님이나 서로의 인정이 서로를 존재하도록 만든다.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정이 필요하다. 지금껏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직장에서 노력을 쏟으면 더 많은 연봉, 더 나은 직위, 안정적인 수입을 얻게 되리라는 믿음이다. 직장인은 합당하게 인정받기 위해 불편한 인간관계, 아리송한 업무지시, 시시껄렁한 농담, 피곤한 회식자리를 견디며 살아왔다. 일이 삶을 침범하더라도, 삶이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로 인해 일과 삶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에도 일하는 삶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분명해진 건, 내가 직장을 인정한다고 직장이 그만큼 나를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직장인 개개인이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회사의 평가제도와 보상체계, 직장동료들의 평판이 그에 합당한 인정을 주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일한 만큼 주지 않았으니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태도가 설득력을 얻는 시대다.  그동안 일에 너무 많은 것을 바치며 살아왔구나, 하고 사람들이 느낀 것이다. 이제 그 노력을 그만두겠다는 것이다. 이제 퇴사는 하나의 사회현상이 됐다.

“구인·이직 보고서(JOLTS) 중 최근 12년간 채용, 해고, 퇴사 통계”, 미국 경제정책연구소(Economic Policy Institute), 2022. 10.
“계절 조정된 시민 실업률”, 미국 노동통계청, 2022. 10.


통계를 살펴보면 좀 더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직장인이 직장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덮친 직후인 2020년, 한국과 미국 모두 직장을 그만두는 건수가 늘었다. 2020년 4월 미국에서는 해고(layoff)가 크게 늘었다. 직전까지 4%대였던 실업률은 14. 7%까지 치솟았다. 이후 1년 만에 4%대 미만으로 줄었지만 대부분의 직장인이 이미 직장에 대한 신뢰를 잃은 뒤였다. 한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는 2020년 12월에 종사자수가 크게 감소했다. 계약 연장 중지, 정리해고를 포함한  비자발적 이직이 전년 동월 대비 약 178% 증가한 결과였다. 2022년 8월을 기준으로 한국의 종사자수는 최근 3년간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직장이 직장인의 삶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목도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직장생활을 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22년 8월 사업체노동력조사 중 최근 3년간 종사자 통계”, 고용노동부, 2022. 9.
“2022년 8월 사업체노동력조사 중 입·이직 사유별 입직자 및 이직자 동향”, 고용노동부, 2022. 9.


우리 사회에서 소명의식, 직업윤리, 장인정신은 주인의식만큼이나 우스운 말이 됐다. 한국사회에서 직업은 밥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밥벌이로서의 직장생활마저도 우스워지기 시작했다. 팬데믹으로 인한 침체를 방어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너도 나도 돈을 풀면서 자산시장이 요동쳤다. 자산소득이 노동소득을 월등히 앞지르는 현상을 수많은 직장인들이 목도했다. 주식, 부동산, 암호화폐가 분에 넘치는 평가를 받으면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벼락 거지의 기분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일한 결과로 더 나은 인간이 되거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은 너무나 순진하게 들린다. 미국이 연이어 금리를 올리면서 자산시장이 폭락하고 있지만, 노동소득이 중요하다거나 노동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불평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흔히 보인다. 다음 호황기를 기다리며 부동산 최저가 타이밍을 잡는 사람에게 직장은 투자원금을 모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직장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직장인, 직장에 대한 신뢰를 잃은 직장인은 우리 사회가 피할 수 없는 결과다. 회사에서 인사업무는 인적자원을 의미하는 HR(Human Resources)로 불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자원이다. 땅에서 캐는 천연자원, 사람이 만든 인공자원과 다르지 않다. 최대한의 생산성을 도출하기 위한 도구다. 직장인의 소명의식, 직업윤리, 장인정신은 중요하지 않다. 직장과 직장인 사이의 신뢰도 중요하지 않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그 과정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직장인, 불신하는 직장인이 양산된다. 젊은 티를 내려는 몇몇 회사는 굳이 HR팀을 피플(People)팀으로 명명하면서 회사의 복지와 자유분방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사람을 사물로 보는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HR이나 피플이나 영혼 없는 직장인을 낳는다.




자, 다시 묻는다. 이제 우리는 어떤 직장인이 되어야 할까? 우리 삶에서 가장 꽃다운 시간을 흐린 눈으로 흘려보낼 것인가? 퇴근하는 날만, 은퇴하는 날만 기다리며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해답은 드러내기와 감추기로 구성되는 인간 행위의 오묘함을 깊이 생각할 때에만 나타날 것이다.

이전 09화 있어 보이는 비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