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펜을 말끔히 지우는 방법

by 부크럼



싫어요.
싫다뇨? 싫은데 일주일에 두 번은 꼬박 만나고 밤새워서 통화하고 주말에 영화 보자고 했어요?

그때 나의 고백은 단칼에 잘려버렸다. 상실감은 그다지 없었다. 단칼에 거절당했다는 창피함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된 후 단칼에 거절당했다는 창피함에서 그 사람의 진심에 비해 나는 너무도 가벼웠다는 창피함으로 번져갔다.
아뇨. 영화 보자고 한건 당신이 좋아서 그런 거고요, 지금부터 우리가 서로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고 마음을 기대고 서로의 섬세함을 맞춰가는 사이가 되긴 싫어서요.
첫 번째. 지워지지 않는 유성펜은 클리너를 뿌려서 지워야 해요. 두 번째 휴지에 아세톤을 살짝 묻혀서 지워요. 세 번째 유성펜 위에 수성펜을 덧칠해서 닦으면 유성펜이 지워져요. 첫 번째 두 번째 방법은 무언가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이용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것으로 지우는 것은 당연하단 말이죠. 깔끔하게 지워지니까요. 문제는 세 번째라는 말이에요. 수성펜은 분명 무언가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 신기하게도 유성펜을 지울 수 있어요. 위에 덧칠해서 유성물질을 수성으로 희석하는 방법이죠. 문제는 세 번째 방법을 어려번 써서 지우기 버릇하면 지울 수 없는 옅은 자국이 남는다는 거예요. 그때에는 간단하겠죠. 굳이 지우기 위해 무언가를 쓰지 않아도 근처에 있는 펜으로 쉽게 쉽게 지울 수 있으니까요. 근데 내 말은 이거에요. 그게 지운 거예요? 자국이 남는데요?

사람을 사람으로 지우기 시작하다 보면 편한데요. 그게 나중엔 엉켜서 뭐가 그리운지 뭐가 슬픈지 잘 몰라요. 마음에 너무도 많은 흔적이 남아서, 그전의 하얀색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난 당신이 좋아. 그래서 지금은 안돼요. 돌이킬 수 없는 방법을 택하지 마요. 당신, 술만 먹으면 전에 만났던 사람 흉만 보고 있잖아요. 그거, 못 잊은 거예요. 마음에 얼룩이 덕지덕지 있어. 당신이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나에게 왔음 좋겠어. 그때가 되면 내가 먼저 말할게요.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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