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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Apr 24. 2018

지구 나이보다 오래된 도시에서_비블로스

고대 문명 유적지에서 세계사를 읽다

작년 가을 인사청문회에 나와 논란이 되었던 장관 후보자의 발언. 그는 신앙적인 입장에서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라고 했다. 과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경악할 뉴스였다.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라면 신석기시대의 일부가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알려진 레바논 비블로스의 역사는 6천 년보다 길다. 과연 나는 몇 달 전 지구를 떠났다 온 것인가.


5천 년 전 페니키아 시대의 돌집과 성벽 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비블로스(Byblos)

비블로스의 기원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BC 6천 년경, 비블로스에는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해안가를 따라 작은 어촌이 형성되었다. 비블로스는 ‘지속적으로’ 사람이 살았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같은 개념의 고대도시로는 팔레스타인의 제리코(Jericho, 여리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와 알레포(Aleppo)가 있다. 


비블로스 항구. 오른쪽 멀리 십자군 성채가 보인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약 40km를 달리면 항구도시 비블로스에 도착한다. 오래된 도시답게 비블로스는 고풍스러운 느낌이 난다. 큰 도시가 아니라서 대부분의 여행자는 반나절 정도 둘러보고 떠난다고 한다. 다른 여행자의 기준을 내게 맞추는 것은 신어보지 않은 신발을 빌리는 것과 같다. 눈부시게 푸른 지중해를 바라보며 해안가를 걷고, 다양한 시대의 고대 유적을 둘러보고, ‘수크’라고 불리는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내게 맞춤한 신발을 내일이나 모레까지 신을 수 없고 오늘 저녁에 돌려줘야만 한다는 현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비블로스 시내에 있는 중세 십자군시대 유적 세인트 존 성당.


오스만제국 시대에 건축된 재래시장 Old Souk 입구.


재래시장 상점들이 문을 열기 전에 가면 고즈넉한 느낌을 즐길 수 있다.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면 재래시장은 활기를 띤다.


레바논은 우리나라 경기도만 한 크기이다. 이 자그마한 나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 다섯 군데나 있다. 비블로스가 그중 하나다. 8천 년이 넘는 정착의 역사와 신석기시대부터 오스만제국 시대까지의 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도시는 흔치 않다. 시대별 고대 유적을 한눈에 보려면 비블로스 성채 입구에서 입장권을 사야 한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문이 열리기 전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거늘. 한적한 카페에서 레바논식 아침을 먹은 후 들어갔다.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여유 있게 둘러보기 좋았다.


연보라색 부겐빌레아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곳.


보라색 부겐빌레아 꽃잎이 떨어지는 카페에 앉아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도 여행의 묘미.


*여행 tip :  입장을 하고 나면 스낵이나 음료수를 파는 매점이 없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행자는 물을 넉넉히 준비해서 들어가야 한다.  


십자군 점령기에 세워진 성채의 입구.


비블로스 성채 주변 성곽과 그 너머로 보이는 신도시.


아이가 죽으면 토기를 관으로 사용한 신석기시대의 장례풍습. 성채 내 박물관에 전시됨.


유적지 입구에 서있는 커다란 성채는 십자군 점령기 때 건설되었다. 천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비블로스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유물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성채를 둘러본 후 성문을 되돌아 나와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면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오벨리스크 신전 터, 기원전 2천 년으로 추정되는 왕의 공동묘지와 석관, 로마 시대의 도로와 원형극장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적이 있다. 서로 다른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는 건축물을 보고 있노라면 비블로스의 오랜 역사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페니키아 시대의 집터와 성벽 유적. 성벽과 도시 사이로 항구까지 연결된 도로가 있었다.


고대 유적 너머로 푸른 지중해가 보인다.


로마시대 유적


페니키아의 핵심도시, 비블로스

이집트 고대 왕조 때부터 비블로스는 이집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지중해 세계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하면서부터이다.  페니키아는 지금의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 등 지중해 동쪽 해안 지대에 형성되었던 도시국가이다. 주로 베이루트, 시돈, 티르, 비블로스 등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비블로스는 페니키아가 세운 첫 번째 도시이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도시였다


비블로스 고대항구 유적. 


비블로스는 이집트와 주변 국가로 목재를 수출하는 중요한 항구였다. 또한 이집트에서 금과 파피루스를 수입하여 지중해 일대에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비블로스는 엄청난 부를 쌓기 시작했다. 부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페니키아는 지중해 일대를 장악하였고 아프리카 북쪽에 식민도시까지 건설하였다. 페니키아가 현재 튀니지 땅에 건설한 도시는 ‘카르타고(Carthage)’. 페니키아어로 카르타고는 ‘새로운 도시’인데 여기서의 도시는 ‘티르(Tyre)’를 뜻한다. 티르는 레바논 남부 해안에 위치한 곳으로 비블로스와 더불어 페니키아의 핵심 도시였다. 


지도 출처 : 구글맵. 페니키아 핵심도시 비블로스, 시돈, 티르 그리고 카르타고.


로마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던 명장 한니발의 나라 카르타고는 페니키아가 세운 도시국가였다. 카르타고와 로마 간의 전쟁을 왜 ‘포에니 전쟁’이라 했을까? 포에니는 로마인이 카르타고 주민을 부르던 명칭이며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의미한다. 페니키아가 세운 첫 번째 도시이자 핵심도시는 비블로스이므로 페니키아의 시작은 비블로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사에서 페니키아에 관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고리들이 하나로 꿰어지기 시작했다. 로마시대의 유적인 원형경기장에 서서 푸른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수천 년 전의 페니키아 역사가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바라보는 지중해. 원형경기장은 1930년대에 원래 사이즈의 1/3 크기로 줄여 재건축함.


보라색 나라 페니키아

그리스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 페니키아는 ‘보라색 나라’라는 뜻이다. 왜 수많은 색 중에 하필 보라색이었을까? 

지중해 연안에서 나는 뿔고동의 분비물은 햇빛과 공기에 노출되면 보라색으로 변한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은 이 분비물을  염색에 이용할 줄 알았다. 뿔고동의 분비물로 만들어진 진귀한 염료 가루는 같은 무게의 은과 교환될 정도로 고가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뿔고동은 티르(Tyre)에서 많이 자생했기에 보랏빛으로 염색된 색깔을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 또는 페니키아 퍼플로 불렀다. 귀한 티리언 퍼플로 염색된 옷은 황제와 극소수의 사람들만 입을 수 있었던 까닭에 로열 퍼플이라고도 불렀다. 


알파벳의 기원 페니키아 문자

활발한 해상 교역을 통해 여러 나라에 문화를 전파한 페니키아. 페니키아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22개로 이루어진 표음문자이다. 기원전 1050년 경에 사용된 페니키아 문자는 그리스로 전해져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페니키아 문자는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아히람 왕의 석관에 새겨져 있다. 석관은 베이루트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페니키아 문자는 22개의 자음으로만 이루어짐.


헬레니즘과 로마 문명 그리고 그 이후

페니키아의 또 다른 핵심도시 티르가 지중해의 주요 항구로 부상했던 기간 동안 비블로스는 침체기를 맞았다. 하지만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이 페니키아 도시들을 정복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 아래 놓인 비블로스는 언어, 의복 양식뿐만 아니라 모든 헬레니즘 문화를 흡수하였다. 이 시기에 비블로스는 파피루스 덕분에 다시 번창하게 되고 페니키아어로 ‘그발(Gebal)’이라 불리던 도시 이름은 비블로스로 바뀌었다. 그리스가 붙여준 비블로스(Byblos)라는 이름은 파피루스를 뜻하는 그리스어 biblos에서 나왔다. 성경을 의미하는 Bible, ‘책’과 관련 있는 영어 접두사 biblio도 어원이 같다. 


*여행 tip : 현재 레바논에서는 비블로스를 ‘주베일(Jbeil)’이라고 부른다. 페니키아 시대에 부르던 ‘그발(Gebal)’에서 파생된 이름이라고 한다. 레바논 사람과 대화할 때는 비블로스보다 ‘주베일’이라고 하면 바로 알아듣는다. 


로마 원형경기장. 원래의 터에서 옮겨 크기도 1/3로 줄여서 재건축 했다고 함.


헬레니즘 시대가 끝나자 비블로스는 4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로마는 어김없이 비블로스의 도로를 정비하고 커다란 신전을 세웠으며 원형극장을 만들었다. 로마제국이 망한 후 비블로스는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십자군 전쟁을 거쳐 1900년대 초까지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로 있었다. 오스만 제국 시대의 대표 유적인 술탄 압둘 모스크는 비블로스 성채 입구 건너편에 있다. 


오스만제국 시대의 유적인 술탄 압둘 모스크. 파란색 지붕이 인상적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온 역사의 집산지를 둘러본다는 것은 생각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모르고 가면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유적이 한낱 돌덩이로만 보일 수 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고 가면 기대에 못 미쳐 실망이 크다는 사람도 있다. 비블로스는 알고 가야 한다. 누군가가 신앙적으로 믿는 지구 나이 6천 년보다 오래된 역사를 지닌 도시이기 때문이다.   


1억년 전의 물고기 화석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가게. 


1억년 전 백악기 시대의 물고기 화석.



*여행 tip : 신석기시대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보고 싶은 여행자는 재래시장으로 가시라. 약 1억 년 전 백악기 시대의 물고기 화석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가게가 있다. 바다가 없어지고 육지가 상승할 때 레바논 산맥에 묻힌, 지금은 멸종된 희귀 물고기들의 생생한 모습이 화석에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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