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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근영 May 01. 2018

이탈리아 젤라또보다 특별한 레바논 아이스크림-하리사

낯선 사람을 친구로 만들어주는 음식의 힘


나는 아이스크림 마니아이다. 마니아(mania)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광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상 모든 아이스크림을 미칠 정도로 좋아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깍쟁이답게 맛있는 아이스크림만 좋아한다. 물론 ‘맛나다’는 말은 물론 추상적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맛의 기준 또한 달라진다. 아이스크림에 관한 내 기준은 이탈리아 젤라또(gelato)에 맞춰져 있다. 젤라또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 체류한 5년 동안 체득한 나만의 선별 기준이어서 나는 내 미각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먹은 젤라또를 차곡차곡 쌓으면 밀라노 두오모 첨탑보다 높지 않을까? 나는 해외여행을 가서도 아이스크림 맛집이 눈에 띄면 달려가서 사 먹는다. 대개는 이탈리아 젤라또의 향수를 달래줄 정도의 수준이지만 작년 여름 레바논에서 만난 아이스크림은 매우 특별했다.  



비블로스(Byblos) 유적지에서 뜨거운 햇살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너 시간을 보내고 난 후였다. 탈수현상인지 엄청난 갈증이 일었고 생수로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허기까지 몰려왔는데 마땅히 먹을 간식거리도 없었다. 베이루트로 돌아가면 허기를 달래줄 군것질거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다. 비블로스 길안내를 맡아준 후앗 아저씨가 레바논 최고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려가 준다고 했다. 레바논 최고의 아이스크림이라니. 오호 횡재라. 이탈리아 젤라또보다 맛날 거라는 아저씨 말에는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레바논에서 겨우 이틀을 보내 놓고 나는 은근히 레바논을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전면 유리로 만들어진 Le Cremier 아이스크림 매장.


‘Le Cremier’라는 프랑스어 간판이 보였다. 전면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은 고급스러웠고 매장으로 들어서니 인테리어가 깔끔했다. 진열되어 있는 아이스크림의 종류는 언뜻 보기에도 수십 가지는 족히 돼 보였다. 주문받는 직원의 말에 따르면 45가지 맛이 있다고 했다. 후앗 아저씨에게 추천을 부탁했더니 레바논의 멜론과 작은 귤 클레멘타인은 꼭 먹어봐야 하는 맛이라고 했다.  


45가지 맛으로 이루어진 Le Crémier의 다양한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뜬 순간 묘한 흥분이 일었다. 큰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어떤 첨가물도 섞이지 않은 천연의 향이 느껴졌다. 달콤함과 시원함의 놀라운 조화. 품질이 좋은 천연재료로 만들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과일의 달콤함은 입안에 끈적임을 남기지 않아 다음 스푼을 뜰 때에는 신기하게도 입안이 깔끔한 상태가 되었다. Le Cremier의 아이스크림은 신선한 재료로 만든 건강한 제품이었고 이탈리아에서 먹던 젤라또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르 크리미에’의 아이스크림이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건 이윽고 벌어진 자그만 소동 때문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갑자기 ‘구운 알라스카 케이크 ‘얘기가 나왔다. 후앗 아저씨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지 빙하 모양으로 만든 아이스크림 케이크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는 자신이 구웠던 알라스카 케이크를 설명했지만 후앗 아저씨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뜨거운 오븐에 들어가면 아이스크림이 녹을 텐데 어떻게 케이크처럼 구워낼 수 있냐고 했다. 알라스카 케이크를 모르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Baked Alaska on saveur.com


기발한 이름의 케이크, ‘구운 알라스카(Baked Alaska)’. 아이스크림을 스펀지 케이크 위에 올리고 머랭으로 꼼꼼하게 덮은 후 뜨거운 오븐에서 구워낸 케이크이다. 머랭이 굳으며 캐러멜화 될 정도로만 짧게 구워내는 것이 포인트이다. 구워진 케이크를 꺼내 칼로 자르면 머랭 안의 아이스크림은 녹지 않은 채로 있다. 머랭이 단열재 역할을 하여 아이스크림이 오븐 열에 녹지 않도록 감싸주기 때문이다.  


후앗 아저씨에게 설명을 하느라 우리 테이블이 웅성거리자 매장 직원이 다가왔다. 혹시 우리가 먹는 아이스크림에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후앗 아저씨는 직원에게 구운 알라스카 케이크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직원 역시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직원은 영어가 가능했고 알라스카 케이크 작업의 세세한 설명을 듣더니 갑자기 호기심을 보였다. 알고 보니 이 직원은 아이스크림 매장의 주인이었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열려있는 마음을 가진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음식에 관한 그의 열정은 유명 셰프 못지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 친구는 직접 시범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주인은 흔쾌히 재료를 준비해 놓겠다고 했다. 


진지하게 설명을 듣는 가게 주인 카산.


 열정이 가득하다 못해 뜨거움이 넘치는 가게 주인 카산(Ghassan). 아버지의 사업을 운 좋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비즈니스의 기본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쉴 새 없이 일하는 워커홀릭이다. 그의 열정에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카산과 아내는 우리를 데리러 숙소로 와주었고 우리는 다시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향했다. 친구는 준비된 재료로 알라스카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고 카산은 몹시 흥분한 듯 들떠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아내 크리스티안 그리고 아들 제이슨과 딸 제니퍼는 차분히 진행과정을 지켜보았다. 한국인을 만난 건 처음이라는데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지 않고 그들은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여러 개의 카메라와 휴대폰이 총동원되어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전면 유리로 만들어진 매장 건물은 밤에 보아도 세련되고 멋있다.


재료를 급조해서 만드느라 케이크가 예쁜 모양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카산과 그의 가족은 무척 기뻐했다. 매장 2층에 둘러앉아 다같이 시식을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카산은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시식이 끝난 후 그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밤 10시가 다가오는데 초대라니!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다 얼떨결에 카산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아이스크림을 넣고 만든 '구운 알라스카 케이크(Baked Alaska)'


비블로스를 둘러보고 시간이 되면 가보리라 맘먹었던 하리사(Harissa) 지역. 시간이 없어 포기했는데 카산의 집은 하리사에 있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진리는 불변의 법칙이다. 늦은 밤 하리사의 높은 탑 위에 올라가 우리는 멋진 야경을 보게 되었다.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카산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이 소유한 레스토랑 부지를 보여주었다. 셰프 수준으로 요리를 잘 하는 카산은 멋진 패밀리 레스토랑을 구상하고 있었다. 카산의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Le Cremier는 직영점과 체인점을 여러 군데 두고 있다고 한다. 아이스크림 사업에서부터 레스토랑 비즈니스로 확장하려는 그의 사업계획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플랜이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하리사에서 내려다 본 야경.


카산의 아버지 때부터 시작한 Le Cremier 본점.


잠시 후 우리를 태운 차는 엄청난 저택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집이었고 아래층은 아이스크림 공장으로 연결되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아이스크림 공장 견학은 신기하고 재밌었다. 100% 천연재료로 만드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카산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1950년부터 시작된 아이스크림 브랜드 Le Crémier.


카산의 집과 연결된 아이스크림 공장 냉동실 내부.


견학을 마치고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이쁘고 쿨한 크리스티안이 만든 저녁을 다같이 먹으며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아이스크림에서 시작된 우리의 특별한 인연에 모두 입을 모아 감사했다. 카산과 크리스티안이 결혼까지 하게 된 것도 아이스크림 덕분이라고 했다. 크리스티안은 이쁘고 똑똑한 변호사이다. 그녀는 카산이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매장에 자주 들렀다. 친구들과 똑같이 주문을 해도 유독 그녀의 아이스크림만 산처럼 높이 쌓여 나왔다고 한다. 첫눈에 크리스티안에게 반한 카산은 그녀의 컵에 아이스크림을 수북하게 담아주었던 것이다. 카산의 애정공세는 아이스크림보다 달콤하게 이어졌고 그들은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선남선녀가 만나서 낳은 두 아이는 또 얼마나 인물이 출중하던지. 마침 방학이라 일찍 잘 필요가 없다며 아이들은 우리와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주입식 교육만 받아 토론이 약한 우리나라의 학생들에 비해 두 아이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논리 정연했다. 국적과 나이 차이를 잊게 해 준 대화에 우리도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생기고 어른스러운 아들 제이슨은 14살이다. 아빠의 사업을 물려받아 해외에 매장을 내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놓았다.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두바이를 시작으로 치밀하게 지역 선정까지 해두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름을 잘 기억해 두시라. 어느 날 한국에도 Le Cremier 아이스크림 매장이 오픈될 수 있으니까. 


예쁘고 똑똑한 딸 제니퍼는 10살이다. 장래희망을 물어보니 의사라고 대답했다. 그다지 특이한 희망은 아니었는데 이어진 제니퍼의 말에 우리는 한방 맞은 듯했다. “현재 꿈이 그렇다는 얘기예요. 아시다시피 아이들의 꿈은 바뀌기 마련이니까요. 저도 살아가면서 다른 꿈을 꿀지도 모르겠어요.” 똘망똘망한 제니퍼의 눈동자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제니퍼가 자신의 길을 잘 찾아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이슨과 제니퍼 같은 총명한 아이들이 있기에 레바논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레바논 대표음식인 고기요리 키베(kibbeh), 아삭하고 풋풋한 오이 그리고 산양우유로 만든 요구르트 라브네(labneh). 고기와 오이를 요구르트와 같이 먹는다.


아내가 만든 음식을 서빙하는 카산.


음식은 무기보다 강하다. 낯선 사람을 친구로 만들어주는 음식의 힘은 놀랍지 않은가. 아이스크림 덕분에 레바논에 좋은 친구가 생겼다. 다음에 방문하면 카산이 구상하고 있는 레스토랑도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때는 며칠 머물면서 좀 더 다양한 음식 문화를 교류하고 싶다. 중동 음식의 백미 레바논 음식과 한식의 조화는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레바논 여행에서 좋은 인연을 맺어준 Le Cremier 아이스크림은 내게 이탈리아 젤라또보다 특별했다.  


카산의 아내 크리스티안(왼쪽)과 아빠를 많이 닮은 딸 제니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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