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바이씨클
엄마 찾아 자전거 타고 삼만리
by WineofMuse Feb 18. 2022
울산 태화강변에서 나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잡혔다.
그 형들은 본부가 대구랬다.
나보고 대구로 같이 가자고 했다.
"대구 갈래?"
"끄덕"
나도 목적지가 대구이니 그러자 했다.
그 형들은 텐트를 가지고 다니며 전국의 아이들을 모아 오는 모집책이었다.
다리 밑에 텐트를 치고는 주거지로 삼았다.
어느 날 하루는 공룡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밥 대신 검은 봉다리를 주었다.
여기 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뱉고 해 봐
"공룡이 지나갈 거야"
공룡 대신 두통이 왔다.
개새끼들...
그렇게 나는 대구로 오게 되었다.
수고하십니다!
씩씩하게 꾸뻑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인사를 한다.
손잡이를 딱!
잡고 삐딱하게 선다.
저 붉은 태양 아래 시들어가는 꽃 한 송이가.
피어보려고 피어보려고
발버둥...
어쩌고 저쩌고 사슴 어쩌고
...
찬혁이가 울고 갈 엇박에 지디가 한수 접을 SWAG이었다.
90년 대구의 뜨거운 한 버스 안
구정물이 뚝뚝 흐르는 작은 소년이 위태롭게 버스 손잡이를 손끝에 겨우 걸치고
일장 연설을 내리 꽃아 넣었다.
수차례 겪은 일인 양 승객들은 별 관심이 없다.
버스 안의 라디오 소리와
비트 없이 흐드러지게 뱉어내는 중얼거림
흔들흔들 버스 안에는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소년과 버스, 신문과 승객은 이질감이 가득한 한 공간에서 서로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고
그 소년들은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없거나 잃어버린 아이들이었다.
정해진 루틴이 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한번 휙 승객들을 봐야 했다.
손에 신문이 있나 없나.
누군가 앞에서 한번 휩쓸고 간 버스일 수도 있다.
그나마 모든 게 귀찮던 버스기사님은
"왔다 갔다"며
앞서 어느 누군가가 이미 신문을 팔고 떠났다며 알려주시기도 했다.
무임승차에 대한 개념도 없을뿐더러
신문을 파는 아이들을 모질게 내리라고 하기에는 정서적으로 거스르는 부분이 있었으리라.
어찌 놓고 보면 첫 취업인 셈이다.
훗날 서른이 넘어서 모신문사에서 3년을 근무한 걸로 보면 언론과의 인연은 30년은 족히 되는 셈이다.
오전에는 30부를 들고 나서야 했고
10,000원을 본부에 내야 했다.
오후에는 50부를 들고나갔고 20,000원을 납부해야 했다.
신입생의 입장에서 요령이 없는 경우는 한 달 정도 유예기간을 주거나 했지만
그 이후에는 짤 없이 금액을 채워서 내야 했다.
3달간은 저금통에 쌈짓돈을 꺼내어 얼마간 채워 넣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말 벼룩의 간을 내어 쪼개 먹을 새끼들이었다.
신문이 안 나오는 일요일은 쉬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신문이 나오지 않는 날에도 전일자 신문을 들고 나서야 했다.
전일자 신문은 영 인기가 없었고 가끔은 욕을 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어제 신문이 신문이냐 새끼야!"
한부에 500원을 받았지만 거스름돈 없이 1,000원짜리를 주시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5천원짜리 한장이나 1만 원짜리를 받는 경우에는 반나절은 놀아도 되었다.
대장의 이름은 박문수였다.
대구에 3개의 신문팔이 조직이 있다고 들었다.
어디는 대장이 아주 무서운 사람이고
어디는 깡패인데 거기는 여자애들을 데리고 몹쓸 짓을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사 박문수의 어사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인간적이고 너그러운 면모가 있던 사람이었다.
살짝 벗겨진 대머리로 아침마다 큰 솥에 라면을 끓이고는 아이들 손에 신문을 들려서 내보냈다.
점심 즈음에는 장부에 이름과 선이 주욱 그어 하나하나 입금되는 금액들을 적어 내렸다.
ㅇㅇㅇ 누구 얼마...
누구 얼마...
우당탕탕 ~ 탕!! 탕!
어느 날 밤 잠을 자고 있는 방안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주변의 신고 혹은 첩보가 있었으리라.
가스총을 가진 경찰이 쏜 가스총에 문수 아저씨만 기절을 했고 끌려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런게 인신매매의 일종이었다.
애들 모아서 나쁜짓 시키는 것들...
감방에 갔겠지?
거의 매일 라면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라면은 너무나 훌륭한 한 끼였다.
없어서 못 먹던 라면을 매일 먹을 수 있어 너무너무 행복했다.
아침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저녁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오후에 손에 들린 50부의 신문은 당사자의 저녁 밥값이 포함된 신문이었다.
주로 국밥집을 가거나 육교 밑의 라면집 둘 중 하나를 들렀다.
1,000원에 라면 한 그릇이 나오고 밥과 김치가 무제한이었다.
신문에도 나온 유명한 집이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신문을 끼고 자리에 앉아 국물이 말라 없어질 정도로 밥을 양껏 말아먹었다.
김치도 끝없이 퍼먹었다.
끝도 없는 허기에 그렇게 먹어도 주인아저씨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국밥집은 의자가 없었다.
플라스틱 국밥에 숟가락을 푹 꽂아주면 500원이었다.
평상에 앉아서 김치라도 한 접시 받으면 1,000원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어느 누구도 평상에 앉을 생각을 안 했다.
도로 한쪽에 앉아 국밥을 푹푹 퍼먹었다.
나중에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도 국밥집 주인장의 배려였을까.
500원짜리 국밥은 어쩌면 우리만 먹을 수 있는 국밥이었는지 몰랐다.
우리나라에 치토스가 출시된 해이기도 했다.
치토스 봉지를 뜯으면 조그마한 스티커가 있었고
스크래치를 긁으면 해외여행을 보내준다는 문구가 봉지마다 쓰여있었다.
틈만 나면 치토스를 사모았다.
방안에 치토스가 두 박스가 되어 넘치도록 그 짓거릴 계속했다.
한 봉지 더.
한 봉지 더.
일요일이면 물풍선을 만들어 던지며 놀거나
강가로 놀러 가 물놀이를 하곤 했다.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열차 바퀴에 못을 넣어 길게 뽑아내는 놀이를 하고는 했다.
어느 누구도 학교를 왜 안 가냐는 질문을 한 기억이 없다.
대구에 살던 이모가 나를 봤었던 거 같다는 이야기를 훗날 해주었다.
그래 아마도 내가 맞을 것이었다.
나는 대구에서 1년을 보냈다.
대구 시내의 모든 버스를 달달 외우고 타고 다니며 1년 동안 하루 8시간 이상
매일매일 거의 매일신문을 팔았다.
영남대학교 후문 내리막길의 끝 육교 옆 작은 집에 모여 살았고
친척들은 누구 하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토록 그리웠던 엄마와 할머니와 이모와 같은 하늘 아래 한 도시에서 신문을 팔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을 나는 엄마를 찾아왔던 도시에 머물러있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신문을 팔다 보니
어느덧 노련한 신문팔이 소년이 되어있었다.
개인 사물함도 있었고
내 저금통도 소유한 멋진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총재산이 무려 13만 원에 달했다.
당시의 어린이로서는 손에 꼽을 거금을 소유한 어린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스스로 번 13만 원 그 소중한 자산
그 소중한 전재산으로
나는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
뒷바퀴가 철갑으로 둘러진 멋진 아동용 사이클이었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일자형 핸들
기어도 달려있었다.
18만 원짜리 자전거를 13만 원으로 깎아서 현금으로 자전거를 덜컥 구매했다.
내 인생 가장 큰 최초의 사치였다.
일 년을 모아서 한방에 지른 애마
예나 지금이나 탈것은 모든 남자의 로망이었던가.
그 자전거를 타고 아주 먼 어느 대학 앞의 닭꼬치를 하나 사 먹고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찾아온 나의 로망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자전거는 샀는데
열쇠를 안 산 것이다.
영구와 땡칠이 우뢰매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내 자전거는 영원히 나의 곁을 떠났다.
한 달을 넘게 눈물로 골목을 이 잡듯 뒤지며 다녔다.
정말 특이하게 멋진 자전거라 언제든 눈에 띌 녀석이었다.
다시는 못 만났다.
그렇게 영구보다 더 멍청한 나를 원망하며 자전거는 내 곁을 떠났다.
그 상심이 너무 컸을까.
자전거가 없어져서 나는 그만 페이스를 잃어버렸던 걸까.
탈출을 감행했다.
대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친구 2명을 꼬셔 3명이서 나란히 대구역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추노꾼이 출발했다.
무서운 형들이 열차를 세우고 기차에서 난동을 피웠다.
우리 셋은 역사의 파출소 유치장에 갇혔다.
당시에 역에는 항상 파출소가 있었다.
그 추노꾼들은 경찰 아저씨들의 기세와 논리적인 협박에 한풀 꺾여 사라졌다.
너네 다시 잡히면 죽여버린다는 협박과 함께 그 형들은 물러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경찰 아저씨는 부산으로 가는 다음 열차에 우리 셋을 태워서 내려보냈다.
새벽의 어스름한 바다 안갯속 부산 초량역에 우리는 떨궈졌다.
경찰 아저씨.
우리 그냥 내다 버린 거죠?
맞죠?
아직은 얼어 죽기 좋을 만큼 추운 봄이었다.
11살 3월 혹은 4월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주일 정도 부산역 인근을 배회하던 우리는 부산역 한가운데 있는 상담소에 잡혀
부산 소년의 집이라는 곳으로 보내진다.
그렇게 엄마를 찾아 떠난 나의 여행기 1부는 그 지루한 막을 내렸다.
자전거는 나에게 뭔가 각별한 물건이다.
내 힘으로 먼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고 자유를 찾아준 물건이면서
항상 나에게 즐거움만 주는 존재 같다.
지금도 아주 비싸고 좋은 자전거를 하나 가지고 있다.
프레임이 예쁘게 잘 빠진 귀여운 작은 자전거다.
접히기도 하고 아주 빠알간 새빨간색이다.
자전거가 나를 꼬셨다.
그 매력 넘치는 철갑 뒷바퀴로 나를 꼬셨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자전거가 나를 오늘날 여기로 데리고 왔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