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그리고 방어진
울산 방어진은 바다 이렸다.
by WineofMuse Feb 18. 2022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며
슬픈 그대 얼굴~
문세 형님의 붉은 노을처럼 길게 뻗은 노을
태화강변 버스정류장 아래 난간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는 했다.
태화강
동해로 흐르는 울산의 태화강은 동해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분간을 못하는 9살 즈음의 내가
유일하게 아는 강 이름 하나였다.
너무 오래 굶었다.
무작정 엄마를 찾아 대구 방향 버스를 타리라는 마음 하나로만 걸어왔다.
물어 물어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지만
버스표를 사는 것에 돈이 란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낮에는 시장을 배회하거나 오락실 의자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는 했다.
오락실에 딸린 조그마한 화장실은 수돗물을 배불리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물만 마셔 배가 볼록하게 나온 채로 태화강을 바라보았다.
잘 곳이 없어 박스를 네모나게 접어서 웅크려 자거나
트럭 짐칸에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한 번은 연탄 창고 안에서 자다가 새벽에 연탄 갈러온 아저씨와 눈이 마주쳐 서로가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얼굴이 온통 시커매서는 시궁쥐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 얼굴을 씻어준 곳도 오락실이었다.
뿅뿅~ 갤러그 소리가 쉼 없이 들리고 보글보글, 띵띵하는 소리가 끝없이 울렸다.
3시간이고 4시간이고 하염없이 그 소리를 듣고 틈나는 대로 바닥을 쳐다보았다.
100원짜리 하나라도 혹여나 떨어져 있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어른들 말씀은 틀린 것이 없다.
"어디 땅을 파봐라 10원짜리 한 장이 나오나."
정말 땅에서는 100원짜리 한 장이 나오질 않았다.
바닥에는 눌어붙은 사탕만 보였다.
참혹하다.
참혹했다.
참혹했었다.
일주일 즈음되니 일행이 생겼다.
같은 거지 꼴을 한 친구였다.
당시만 해도 육교에서 구걸을 하거나 신문을 팔거나 하는 아동들이 많았다.
88 올림픽을 전후해서 삼청교육대와 고아, 부랑자 소탕작전의 일환으로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각 역사마다 파출소 비슷하게 관할서가 있던 시절이었다.
둘이서 쿵작이 맞아 덜 외로웠다.
햄버거 노점을 털어 햄버거 빵을 훔쳐먹거나 잠을 자더라도 서로의 온기가 있으니 살짝은 견딜만했다.
태화강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었다.
드디어 땅에서 돈이 솟아났다.
항상 가던 강변의 난간은 버스정류장 바로 아래였다.
그 난간 아래로 누군가가 지갑을 흘린 것이다.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 그 외 동전까지 골고루 있었다.
허기에 눈이 뒤집힌 우리는 지갑을 들고 강변을 내달렸다.
동전이 막 바닥을 뒹굴었지만 지폐가 있는 지갑에만 온 신경이 쓰였다.
찬찬히 금액을 나누었다.
에누리 없이 서로 50대 50으로 한 장 한 장 지폐를 나누었다.
수중에 3만 원이 못 되는 금액이 생겼다.
너무너무 행복하고 기뻤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1만 원 이상의 거금을 손에 넣은 악당의 심정이었다.
그 기쁨과 희열에 우리는 이성과 배고픔을 잃어버렸다.
세상 모두가 우리의 금전을 탐하거나 출처를 의심한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럽게 빵을 하나 사기로 했다.
음료수도 없이 지하차도 점빵에서 그냥 가장 큰 빵을 하나 샀다.
무려 1,000원짜리였다.
물도 없이 그 큰 빵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강을 바라보며 반 가량을 먹고는 다시 봉투에 넣었다.
다음을 기약하리라.
지갑을 주운 버스정류장에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몇 번 버스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목적지는 방어진이었다.
방어진은 바다였다.
그 친구는 무슨 수로 방어진이 바다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대단했다.
달랑거리는 비닐 봉투를 들고 우린
방어진에 도착했다.
우리가 떠난 첫 여행이자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바다였다.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아주 작은 배가 여러 개 보였다.
떠내려가지 말라고 줄이 묶여 있었다.
아마도 관광객들에게 대여하는 작은 보트였던 듯하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우리는 그 배를 함께 뒤집었다.
얕은 파도에 찰랑거리는 보트와 모래사장을 두고 함께 배에 올라 놀았다.
파도가 들어오면 뜰락 말락 하는 그 몽글한 기분이 좋았다.
까르르 함께 웃던 그날의 웃음은 참 까랑까랑했다.
"뭐하는 것들이야!!"
누군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주인아저씨였다.
페인트칠을 해둔 배를 뒤집어서 모래에 쓸고 다녔으니
부아가 치민 것이다.
한참을 씩씩 거리는 아저씨의 훈계를 들은 후 우리는 풀려났다.
날은 어둑어둑했다.
다시 태화강으로 돌아가려는 우리를 그 아저씨의 아들이 불러 세웠다.
"야 너희들"
"따라와"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우리는 흠신 두들겨 맞았다.
그 작은 것들을 팰곳이 어딨다고
골고루 아낌없이 때렸주셨다.
정신이 아득했다.
주머니에 있는 현금은 몽땅 털렸다.
차비하라고 각자에게 2,000원을 주었다.
참 자비롭기도 하셔라...
태화강에 도착한 우리는 수중에 각자 1,000원씩 남았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둘이 나란히 앉아 태화강을 바라보며 징징 울었다.
낮에 산 먹다남은 빵 반절은 얻어맞는 와중에 폐가에 두고 온듯했다.
그 빵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빵 말고 좀 더 맛있는 걸 사 먹었어야 했다.
시간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 그 빵을 사는 게 아니었다.
좀 더 부드럽고 맛있는 빵을 사야 했다.
음료수도 사야 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좀 더 맛있는 빵을 살걸.
좀 더 좋은걸 살걸.
맞아서 아픈 건 금방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아픈 건 따로 있었다.
그날 그 큰 빵을 음료수 없이 사버린 나의 선택이 가장 아팠다.
웃긴 일이다.
방어진을 안 갈 생각은 안 한 내가 웃겼다.
아름다웠던 방어진 바다
수려한 해안과 반짝이는 백사장 멋진 풍광이 아스라이 푸르렀던 바다였다.
그림 같은 해안의 쓰러져 가는 폐가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그때의 내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그려지고는 한다.
그래 빵보다는 방어진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