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ineofMuse Feb 19. 2022
58년 개띠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흔하디 흔한 58년 개띠이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자 골칫거리셨다.
애지중지 키웠던 장손이라 버릇이 고약했나 보다.
어린 나이에 술을 진탕 먹고는 주사를 부리고 집을 떼려 부수는 게 일이었다.
가산을 몽땅 말아먹기 전에 할아버지는 중매를 통해 서둘러 장가를 보내셨다.
동갑이었던 엄마는 7남매의 둘째로 일찌감치 미용을 배워 집안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다.
까랑까랑하고 고집스러운 면모에 유독 생활력이 강하신 분이다.
덕분에 80년생인 나도 세상에 나오고 빛을 보게 되었지만
3세가 되던 해에 이혼을 하시고 대구로 돌아가셨다.
가끔 찾아와 그 당시 누런 돞바(점퍼), 과자 선물상자와 용돈을 주고 가시곤 했다.
뽀글 머리 파마를 멋지게 한 젊은 엄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그리운 엄마일 텐데 말이다.
그때부터 그 뽀글뽀글한 파마머리가 싫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이 좋다.
인간은 유아 기억 상실의 터널을 뚫고 세상을 기억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있다.
다소 혼동이 되거나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 뒤섞이기 마련이기도 하다.
넓은 마당을 향해 빨간색 흑백 TV가 날아가는 게 내 기억의 시작이었다.
그 순간 엄마가 사라졌다.
집안에 있는 모든 가전들은 대부분 마당을 향해 날아갔다.
전축부터 밥통, 스피커가 마치 날개가 돋친 듯 마당을 향해 날아갔다.
아버지의 주사가 불러오는 내면의 인격은 멀리 던지기 선수였나 보다.
무거운 것일수록 멀리 던져야 점수가 잘 나오는 사람처럼 힘껏 마당을 향해
집안의 모든 살림살이들을 던져댔다.
80년대생이 폭격을 맞아본 세대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기분을 약간이라도 이해한다.
술은 항상 우리 집 마당에 폭격을 가했다.
우리 집 마당이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고스란히 다 받아내고
더 이상 던질 폭탄이 없어진 멀리 던지기 선수는 깊은 잠에 빠졌다.
할머니는 꼬부랑하게 굽은 허리가 땅에 땋을 듯 한숨을 내쉬며 물건들을 집어 드셨다.
미국의 유명 TV 시리즈 "V"가 하던 시절이다.
마당에 의자를 깔아 두고 동네에 별로 없는 컬러 TV를 꺼내어 왔다.
요즘으로 치면 작은 소극장 형태의 진형이 갖추어졌다.
"애들은 들어가라"
"싫어"
"들어가 자라"
"싫어"
"짝~!"
귀싸대기가 한대 올라왔다.
살면서 이렇게 아픈 게 있구나를 깨달았다.
천둥 같은 따귀와 함께 "V"는 물 건너갔다.
다이애나가 언제 쥐를 잡아먹을까?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당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잠들었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 술을 진탕 마시고는 동네 초입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8살 남짓의 나는 노쇠한 할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질질 끌고 집으로 들여놔야 했다.
백 미터를 한 시간이 넘게 씨름하다 보면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조금은 도와주거나 했지만
그마저도 술 취한 사람에게 봉변을 당한 몇몇 어른들은 할머니와 나를 모른 척 하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할머니를 때리거나 집을 부수거나 하는 날이면 이불을 꼭 뒤집어 쓰고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 만을 기다렸다.
아버지의 술에 따라 집안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어느 날은 집이 멋지게 수리되어 있었다.
겨울에 춥다고 외풍을 막아줄 비닐 칸막이가 집을 쭈욱 둘러쳤다.
올겨울은 외풍 없이 잘 지내겠다는 할머니의 기쁜 목소리가 선하다.
섣부른 기대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술에 진탕 취한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공사해둔 멋진 방풍막들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서글픈 진눈깨비들이 찢어지고 부러진 방풍막 사이로 파고들었고
할머니의 통곡은 여지없이 동네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집안의 족보를 팔아 치웠을때보다 서럽게 우셨다.
정작 할머니 자신은 올라가 있지도 않은 족보였을텐데 말이다.
불쌍한 우리 할머니는 여느 어머니들이 그렇듯 큰아들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남다른 분이셨다.
손주인 나를 어찌나 이뻐하셨는지 모른다.
그런 할머니를 두고 자꾸만 가출을 하는 내가 얼마나 안쓰럽고 미웠을까.
나는 끝까지 할머니를 지켰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철이 없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크게 후회스러운 부분이다.
할머니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는 어느 날 화장이 짙은 아줌마를 데려왔다.
엄마라고 부르라 했다.
그 아줌마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보라색 반짝이 원피스를 입고 절에 데려가곤 했다.
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아줌마를 쳐다봤다.
그 멋진 아줌마 역시 며칠도 안되어 사라졌다.
아줌마가 사준 공책과 연필로 한글을 공부하는 나까지 꼴도 보기 싫었을까.
어느 날은 술을 마시고 들어와 나를 던졌다.
붕~ 날아가 머리를 문지방에 얼굴을 세게 박았다.
잘못했으면 목이 부러져 죽었을 일이었다.
얼굴이 벌에 쏘인 사자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할머니는 얼굴 한가운데 된장을 척~ 바르고는 칭칭 감았다.
한글 공부하겠다는 애를 집어던진 아버지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집을 잃어버린 벌처럼 툭하면 집을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줌마를 데려왔다.
할머니로부터 독립을 하고 제대로 살림을 차리셨다.
2층 양옥집의 방한칸, 내가 지낼 공간도 따로 있었다.
다락이었다.
무슨 일인지 다락에서 잘 때는 항상 바깥에서 문이 잠겼다.
더워 죽을 것 같은 여름에도 문이 잠겨있었다.
작은 창 사이로 겨우 숨을 내쉬고는 했다.
이번 엄마는 좀 특이하게 나만 국을 따로 끓여줬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국이었는데 데우고 또 데우고 계속 뜨겁게만 해서 줬다.
토할 때까지 먹일 작정인듯했다.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3시간 거리의 약수터에 가서 약수를 떠 오라고 시켰다.
혼자 가서 몇 시간이고 걸어서 약수터에서 약수를 길어오면 어른들이 참 대견해했다.
속도 모르면서...
후덥지근하고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서
도저히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어서 가출을 했다.
또 다른 아줌마가 왔다.
이번에는 시골이었다.
감나무가 많은 시골에서 한창 감을 따다가 버스를 타고 올 언니를 마중 나가자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버스 정류장을 하나씩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깜깜해졌고 우리는 길을 잃어버렸다.
공사장의 동그란 수도관 안에서 나란히 새우잠을 자고 아침에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동네는 난리가 나있었고 나는 가자마자 귀싸대기를 맞았다.
또 가출을 했다.
이번에는 아줌마가 없었다.
대신 신박사라는 이상한 아저씨가 사는 초가집 옆으로 이사를 갔다.
아마도 막일 판에서 만난 정신이 조금 나간 아저씨였던 걸로 기억한다.
길이 없는 산속을 걷다 보면 길이 나오고 봉우리를 두 개 건너고 개울을 가로질러서 다시 길이
나오면 방 두 칸짜리 초가집이 나왔다.
부엌에는 가마솥이 두 개 걸려있었다.
아침이면 가마솥 뜨거운 물을 퍼다가 세수를 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 뜨끈한 물을 대접에 한가득 푸고는 간장을 어느 정도 휘휘 풀고
단숨에 들이켜고 일을 나가셨다.
대체 무슨 맛일까?
몇 번째 국민학교인지 모르겠다.
몇 번째 아줌마인지 모르겠다.
몇 번째 엄마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무 많은 엄마와 아줌마와 국민학교가 교차되었다.
그렇게 내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했다.
집에 가는 길이 무서웠다.
아니다.
길이 아니기에 무서워 가지를 못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없는 곳에 집이 있었고
밤에는 길이 없기에 찾아갈 방도가 없어서 집에 가지를 못했을 뿐이다.
캄캄한 밤 산짐승의 시퍼런 안광이 그대로 나를 노려보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다 포기했다.
바위틈에서 쪼그리고 앉아 노숙을 했다.
아침에 아버지가 그 개울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역시나 각오하던 바였다.
귀싸대기가 한대 시원하게 올라왔다.
가출을 했다.
새벽시장을 전전하다 이름 모를 친척에게 붙잡혀 할머니 집에 왔다.
할머니는 자꾸만 가출을 하는 나를 데려가려 하셨고
아버지는 할머니와 자꾸만 떨어져 나가려 하셨다.
굳이 나를 왜 데려가려는 건가.
역시나 가출 후에 맞는 따귀는 짜릿하다.
이번에는 특히나 분노가 가득한 한방이었다.
몇 미터를 날아가 처박혔다.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따라가라고 얼른 할머니가 나의 등을 떠민다.
졸래 졸래 뒷길을 따라 큰길을 따라 또 그 정체모를 산의 입구로 아버지는 들어섰다.
아버지는 훌쩍 4차로를 혼자 건넜다.
홀로 남겨진 나는 가지런히 손을 아래로 모으고
아버지를 향해 90도로 인사를 꾸벅했다.
드라마에서 본 한 장면을 흉내 낸 것일까.
"소자 이만 물러가옵니다."
그날이 할머니와 아버지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큰길을 따라 건널 것인가.
왼쪽의 언덕을 향해 도망갈 것인가.
왼쪽 언덕길을 향해 숨이 멎을 듯 뛰었다.
몇 수 킬로미터를 걷다 뛰다 걷다 뛰었다.
태화강이 나왔다.
2016년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신변을 정리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미 돌아가신지는 6개월이 넘었기에 공공 기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구간에 들어선 후였다.
마지막으로 숨을 거 둔 곳은 경주 모처의 요양병원인듯했다.
경주로 내려가 6개의 관공서를 돌아다니며 남은 흔적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혹시나 모를 악성 부채가 상속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량이나 부동산, 은행 계좌, 채무 어느 것 하나 본인의 명의로 된 게 없었다.
정말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술로 보낸 수십 년간 경제활동은 없었고 평생을 요양병원을 전전하시다 돌아가신 것이다.
딱히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올라왔다.
미묘했다.
뭐랄까..
그냥 그랬다...
돌아가신 해를 셈해보니 58세셨다.
올해까지 계셨다면 아마 64세 셨을 터이다.
불현듯 인간이 손주를 보고 세상을 마감하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복된 일인지 체감이 되었다.
나를 낳은 해가 23세 셨고
내가 9살 때 집을 뛰쳐나가기 시작했을 터이니 고작해야 32살이었을 것이다.
서른둘
스물셋부터 서른둘 사이에 아들 하나 건사를 어찌하지 못하셨겠지.
뚜렷한 원망과 묘한 측은지심이 동시에 들기도 했다.
딸린 아들 하나를 키워야 하니 일도 해야 하고
배운 게 없으니 건축 막일만 주로 하셨으리라 짐작된다.
어릴 때부터 술을 자셨으니 어지간히도 술이 좋으셨으리라.
젊은 새엄마들도 여럿이었으니 인물도 체격도 빠지진 않았겠지.
달빛 아래 논바닥을 배경으로 군대에서 배운 태권도라며 품세와 발차기를 하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밉고 어쩌고를 떠나 그 남자의 발차기는 참 멋있었다.
십 년 단위로 경찰에게서 전화가 두어 번 오긴 했다.
한 번은 거절했고
서른 살 초반에 한 번은 귀찮게 받아서 딱 한번 통화를 한 적이 있다.
"결혼은 했냐?"
"누구 닮아서 했겠소?"
"만나는 사람은 있고?"
"알 거 없고 전화하지 마시오."
뚝...
이십 년이 지나도 전혀 퇴색되지 않은 미움이었다.
작고 약해진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렇게 허공에 흩어졌다.
아버지 나이 서른 초반
아들이 아홉 살이 되는 그 시점
얼마나 놀고 싶고 얼마나 자유롭고 싶었을까.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거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임자없는 그 남자는 얼마나 술이 좋고 노는 게 좋고 여자가 좋았을까.
그 뜨거운 밤과 여인의 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집에 있을 아들은 뒷전이긴 했어도
공허함이 몰려온 후
아들 걱정은 오죽했을까.
큰 가시였고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죽여 없애고 싶진 않았을까?
콱! 죽여 어딘가 산속에 묻어버리고 홀로 자유롭게 살 수 있진 않았을까.
그 아비의 인내가 혹시라도 지금의 나를 존재케 하진 않았을까?
내 나이 마흔셋
나의 아들이 아홉 살이 되는 시점
술 좋아하고 끝없이 놀고 싶고 자유를 갈망하는 나를 보며
이제야 일면 이해가 된다.
뭔가 다른 측면의 이해가 생기기 시작한것이다.
인생은 손바닥 뒤집기이다.
등과 바닥, 검은 면과 하얀 면이 끝없이 교차되며 피와 세대는 계단처럼 이어진다.
어찌 되었건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적어도 9살에는 가출을 하지 않을 아들을 둔 아빠가 되었다.
나는 새로운 국면에서 경이로운 인연과 내면의 세계를 넓혀가는 중이고 와인과 그녀, 글쓰기와 회사일로 아름다운 결말을 꿈꾸며 살고있다.
부자는 서로를 용서할 자격을 잃었다.
용서는 물건너 갔고 이해는 코앞이다.
30여년 만에 문득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은 단어가 생겼다.
"아빠"
이제 그만하자.
놔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