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찌개

만원과 검은 원피스

by WineofMuse

경남 진주

시커먼 공장일을 하며 3개월간 탈탈 긁어모으니

42만 원이 수중에 모였다.

무작정 계획 없이 영등포행 상경 기차에 올랐다.


친구가 지낸다는 신길역 앞의 아주 오래된

여관의 달방을 구했다.

꼭대기 3층의 가장 구석방이었다.

화장실도 세면장도 공동인 여관이다.

신길역 앞에는 과거 오렌지 하우스라는

미군 출입 환락가가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던 때였다.

이른 아침이면 짙은 화장의 무서운 누나들이

깎아지른 듯 거의 수직에 가까운 여관 3층의 달방을 향해 등산하듯 퇴근했다.

그 누나들이 다 씻고 잠이 들어야 공동 세면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가끔 누나들 김치를 훔쳐먹어서 눈치가 보였다.

주인아주머니는 "탈랜트" 최수종이가 묵었던 여관이라며 여기서 묵으면 다 성공해서 나간다는

이야기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떠벌렸다.


대방역 6번 출구 옆의 사출공장

서울, 한가운데

덩그러니 떨어진 열아홉의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직장이었다.

주간 12시간

야간 13시간

주 6일 토요일도 근무가 당연했다.

월급 현금 60만 원을 봉투에 넣어 주었다.

1999년 즈음이니

최저시급 따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었으리라.

나보다 늦게 입사한 검은색 원피스가 잘 어울렸던 경리 누나는 잘살고 있으려나?

통통하고 단발이 잘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일하는 내 모습을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말도 걸어주곤 했는데

시크한 남자, 카리스마 넘치는 사나이 콘셉트를

밀던 그 시절의 나는 그저 멀뚱하니

따뜻한 농담 한번 건네질 않았다.


당시의 내 모습을 그려보자면 이랬다.

얇디얇은 다리에 블랙진

그 시절 유행하던 코가 뾰쪽한 구두

Hot 문희준이 뜨겁게 버려놓은 긴 앞머리까지

세상에...

어지간한 공포영화보다 끔찍한 그 시절의 패션센스는 절로 주먹을 꽉 쥐게 한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의 관심과 눈길을 과도하게 의식했었다.


어는 날인가 월급날 내 봉투에 만 원짜리 한 장이 더 들어있었다. 61장

다시 세어봐도 한 장이 더 있었다.

아마도 경리 누나의 실수(?) 였겠지?

그 시절의 객기가

만원 더 들어왔다며 멋지게

사무실에 돌려주고 말았다.

사장 아저씨의 적당한 눈치,

어색한 침묵과 가벼운 원망 섞인 한숨이 사무실을 살짝 무겁게 눌렀다.

줘도 못 먹냐는 그 시절의 아이스크림 광고 문구처럼 지질한 공기가 흘렀다.

만 원짜리 한 장과 함께

그 누나의 마음도 같이 돌려준 걸까.

통통한 허리 살집이 귀여웠던 까만 원피스는

더 이상 입지 않는 듯했다

나보다 더 마른 말 뼈다귀를 닮아 삐딱하게 생긴 선배와 사귀더니 동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선배의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가 혹여나

그 누나와 같을까 몰래 향기를 맡아보기도 하고

혼자 낙심하고 그랬다.

지질했다.

그때의 그 옹졸한 가슴 조임은

나이 마흔이 넘어도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


대방역 앞의 오락실은 여의도와 연결되는 곳이라

심심찮게 연예인들이 지나가곤 했다.

한창 pc방을 드나들 때 허니 패밀리가 새벽에 우르르 껄렁거리며

통바지로 일대를 쓸고 가면 그게 그렇게나 멋져 보였다.


12시간 통으로 근무하면

낮에는 점심과 저녁 두 끼

야간조는 야식으로 새벽 2시에 한 끼를 줬다.

지정된 함바집이 있어

동그란 수레바퀴 바큇살처럼 칸칸이 나눠진 반찬통에

김치와 짠지, 젓갈과 나물 등의 찬과 부르스타에 끓이는 찌개를 빙 둘러앉아 의식처럼 챙겨 먹었다.

식사 후에는 각자의 자리 혹은

다락같은 방에 모여 잠깐의 휴식을 청했다.


공장의 업무는 매우 단순하고 기술이 필요치 않았다.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고 양손이 있으면 되었다.

손가락은 몇 개 없어도 일이 가능했기에 몇몇 분들은

손가락이 한두 개 없곤 했다.

사출기계가 손가락을 삼켰지만

여전히 그 자릴 떠나지 못하는 아저씨들은

회식이 있을 때마다 주사가 심했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칫솔이나 빨래건조대의 플라스틱 부분을 찍어내고

칼로 다듬어 포대에 담아 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밥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6일간 회사에서 보내는 매일의 12시간에

먹는 것과 쉬는 것 말고는 낙이라곤 어지간해서는 찾기 어러웠다.

매일 간식으로 나오는 빵과 레스비 캔커피,

식사시간은 일과 중 유일한 희망의 시간이었다.

테이블 없이 우유 상자위에 박스를 깔고

가운데 부르스타를 턱 올리면 시간에 맞춰

식당 아주머니가 식사를 이고 오셨다.


처음에는 밥을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회사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다.

달방 월세도 부담스러웠다.

어쨌거나 하루 두 끼가 공짜로 해결되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못가 현실을 마주했다.

일주일 동안 점심으로 김치찌개가 6번 나왔다.

저녁에는 점심에 먹었던 김치찌개에 햄을 넣어

부대찌개가 되어 6번 나왔다.

그다음 주는 부대찌개 6번을 새벽 2시에 먹게 되었다.


그 망할 찌개 안의 다양하게 생긴 햄들이 김치 조각이

그냥 싫은 게 아닌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싫었다.

긴 모양을 편 썰은 녀석은 푸석하고

네모난 깡통 햄은 비렸다.

살라미와 민찌라 불리는 다진 고기에 애꿎은 콩나물까지 갖가지 불만 속에 봉변을 당하고야 말았다.

중간에 된장찌개라도 나올 법 했건만

식당 아주머니의 대쪽 같은 지조는 변함이 없었다.


자연의 진화가 당연하듯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음식은 당연하게도 부대찌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식당 앞을 지나치기도 싫어

다른 길로 빙 돌아갈 만큼

김치 국물에 삶아진 깡통 햄 그 특유의 향이 싫었다.


그 시절 서울에서 구한 내 직장

대방역 옆 사출공장은

줘도 못 먹는 것과 앞으로 영원히 못 먹게 된 것이

어색하고 부 조화스럽게 뒤섞여있는 부대찌개 냄비 같은 공간이었다.

캐나다로 밀입국을 결정하고 노량진으로 거처를 옮길 때쯤에야 겨우 그 희망 없는 냄비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여 년이 흘러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아이가 둘이고 편식은 나쁜 거라고 준엄하게

이야기하는 아빠가 되었다만 아직도 부대찌개를 먹지 못한다.


아쉽다.

검은 원피스도

부대찌개도

내가 좀 더 나다웠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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