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ineofMuse Feb 12. 2022
부산역을 마주 보고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첫 번째 중국집
거기에 영근이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귀국 후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했을 때 연락해본 친구다.
인천에도 탁두와 정일이가 있었지만
인천은 왠지 내키질 않았다.
진주 쪽에는 임묵이가 있었던가? 안양? 어디로 가지?
집도 절도 없는 신세였다.
영근이는 고등학교 때 같은 환경부 출신으로 아침마다 학교 주변을 2년 동안 함께
빗질을 하며 빛낸 사이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둔했지만 착하고 서글서글했다.
그래서 조금 멀었지만 부산행을 선택한 것도 영근이라는 친구가 있었기에
갔던 것도 있었다.
부산에 도착했다.
내 친구 영근이는 부산역 앞의 중국집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했다.
잘 곳이 없었고 여관을 잡기에는 돈이 없었다.
짜장면 한 그릇을 주문하고 주인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예의 바른 청년임을 각인시키기 위해 크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짜장면을 먹고 교차로와 벼룩시장을 집어 들었다.
때마침 부산에 기록적인 호우가 내렸다.
거리가 정강이 중간까지 비에 잠겼다.
3일 동안 비는 그치지 않았고 매일매일 무릎까지 젖은 채 중국집 의자 4개를 이어 붙여서 눈을 붙였다.
중국집이 영업을 시작하기 전 전날 젖은 신발을 다시 신고
무릎까지 잠기는 거리로 나와 공중전화를 찾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을 빌려서라도 장화를 샀어야 했다.
그때는 왜 장화 생각을 못했을까.
전화를 하다 지치면 오락실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나와 전화질을 해댔다.
첨벙첨벙 비를 헤집으며 공중전화에서 몇 시간이고 부산에 있는 모든 공장에 구직 전화를 걸었다.
기숙사가 있어야 했고 주야를 해서라도 돈을 조금이라도 많이 받는 곳이어야 했다.
수중에 있는 3만 원이 떨어지기 전 한시가 다급하게 취직을 해야만 했다.
부산 다대포 옆의 장림 공단 쪽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 했다.
주간 야간으로 플라스틱 사출을 하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출 쪽 일은 한국인이 가장 꺼리는 직종이다.
쿵쿵 닫히는 사출기계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손이나 손목 그리고 목숨을 잃곤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집 입장 벽은 낮았고 사회 통상적인 임금 또한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그마저도 기숙사가 있고 깨끗한 컨디션의 공장이라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잔업에 특근까지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더니 월 120만 원가량이 나왔다.
서울에서 일하던 것보다 두배는 더 벌었던 셈이다.
차곡차곡 쌓이는 월급에 난생처음으로 플립을 열면 안테나가 자동으로 쭈욱 뽑히는 삼성 휴대폰을 장만했다.
기숙사 근처 미스터 피자에는 학교 친구였던 정민이가 피자를 만들고 있었다.
호기롭게 기숙사에 피자를 돌렸다.
토핑 많이 팍팍 넣어달라고 했다. 서비스로 콜라도 큰 게 여러 병 왔다.
회사가 좋았다.
중국집 배달을 하고 있는 영근이가 생각났다.
"너 이제 오토바이 배달 그만하고 공장에서 같이 일하자"
"직장다운 직장에서 의료보험도 되는 곳에서 일해야지"
자신만만한 어투로 설득했다.
그렇게 영근이도 입사를 하고 함께 회사 생활을 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 영근이는 사교성이 그리 좋지는 못했나 보다.
회사 내의 동갑내기 친구와 이리저리 트러블이 있었다.
영근이 입장에서 억울한 내용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다이너마이트 같던 나는 나보다 한 살 많은 그 동료에게 가서 공장이 떠나가도록
쌍욕을 하고 난리를 쳤었다.
체면이고 뭐고 없을 때이고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깊은 자격지심에 쉽사리 광분하곤 했다.
내 친구 건드리지 말라는 게 아마 주된 내용이었으리라.
4개월 차쯤 회사를 나름 잘 다니고 적금도 들고 친구도 사귀고 슬슬 자리를 잡아가던 참이었다.
윙~ 핸드폰이 울렸다.
플립을 열자 안테나가 지잉~ 위로 올라왔다.
이럴 때쯤 오는 모르는 전화는 항상 문맥상 전개가 좋지 못하다.
군대를 가지 않는 기피자를 쫒는 전국 4명의 형사 중 한 분이었다.
1년째 널 쫒고 있다는 낮은 어조에 얼어붙었다.
나는 고아원 출신이라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래서 캐나다도 보증인 없이 출국이 가능했다.
그 당시 법상 군미필자는 보증인 2인이 있어야 출국이 가능했다.
이는 유승준의 병역 사건 때까지도 유효했다.
어릴 때 울산 본가의 호적이 살아있었다.
말소가 돼도 사망신고가 안 되는 이상 군대는 가야 된단다.
갑자기 군대를 가라니 황당했다.
신검을 받으러 그해 12월 30일까지 부산 병무청에 오지 않으면
큰일이 날것처럼 협박했다.
부산 병무청에서 전국에서 모인 최후의 신검자 3인이 모였다.
한 명은 약에 취한 듯 보였고 한 명은 온몸에 붉은 문신이 가득했고 자신이 서태지 매니저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셋은 광활한 체육관에서 나란히 팬티를 벗고 엎드렸다.
나만 현역 1급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와중에 또다시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고아원에서 발급해준 주민등록증이 싫었다.
나도 할아버지가와 아버지가 있고 본 적이 있는 뿌리가 있는 당당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군대는 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금 단체 생활을 한다는 것과 2년 6개월 이후에 또다시 빈털터리로 사회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 주민등록증이 뭐라고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그때로 돌아간다면 해결이 가능했을까?
2개월간의 고민 후 인천으로 또 무작정 왔다.
병역특례업체가 인천에 많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접했다.
부평역 우체국 건너 대한극장 위 pc방에 자리를 잡았다.
인천 내에 있는 모든 병역 업체 리스트를 뽑았다.
기역부터 쭈욱 전화를 걸었다.
"병역특례 TO 있으신가요?"
디귿에서 한자리가 났다.
ㄷ정밀이라는 곳에서 면접을 보자 했다.
3개월 하는 거 봐서 병역 특례를 시작하자 했다.
운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병역특례에는 국가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나는 자격증이 4개 있었지만 자격증의 주민번호와
병역을 이행하는 주민번호가 달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국방부의 시계는 흘러갔다.
또다시 주야로 기계를 만지며 근무해야 했다.
외로웠다.
부산에 있는 영근이 생각이 났다.
"영근아 여기 올라와라."
"여기 돈도 많이 주고 배울 것도 많다."
항상 구인 중이었던 회사는 언제든 소개만 해주면 기꺼이 채용을 하곤 했다.
같은 처지였을 영근이도 훌쩍 떠나 입사를 했다.
하지만 부산에서와 같은 내용의 트러블이 거듭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친구 편이었던 나는 두어 번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결국 그 트러블의 끝은 나를 향했다.
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옮기고 비웃지 말라며 따지고 들었다.
나는 그저 다른 이들과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광분한 나는 온갖 정신병에 관한 단어를 내뱉으며 영근이를 질책했다.
영근이는 며칠 후 말도 없이 잠적했다.
나에게도 회사에도 아무런 말이 없이 사라졌다.
그 와중에 남은 급여는 받아갔다.
분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소개를 시켜준 내 입장도 난처해졌다고 원망을 하고 싶었을까.
다시 볼일은 없을 거라 냉담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몇 달 후 영근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리저리 회사를 다녀보았지만 네가 있는 회사보다 좋은 회사는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무작정 회사 앞으로 찾아온 친구 영근이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가까운 식당으로 자릴 옮겨 삼겹살을 사 먹였다.
두툼한 삼겹살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도 한잔 사주며 차분히 이야기했다.
"회사에 이야기하는 건 좀 곤란해 영근아."
말도 없이 퇴사한 친구를 다시 받아달라고 하는 게 내 입장에서도 힘든 일 아니겠느냐.
구구절절했지만 결국은 명백한 거절이었다.
잘 가라고 버스까지 배웅하고 멀어져 가는 버스의 뒷모습과 함께 영근이를 잊었다.
겨울이 물러가려는 즈음
영등포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묵직하고 싸늘하고 공무적인 어투였다.
"서영근 씨 아십니까?"
"네..."
"......"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가족 중 누구도 시신을 인계받질 원치 않는다 했고
친족이 아닌 이상 인계도 불가능하다 했다.
당시 설명대로라면
1년간 대학병원에서 시신 해부용으로 쓰인 후 가족에게 소정의 사례금이 주어지고
공동장으로 화장된다 했다.
동문회장에게 연락하여 경찰서로 모였으나 20살 남짓의 사회초년생들이 우르르 모여봐야
딱히 대책이 없었다.
새벽에 처음 전화받고 잠결에 무시한 한 친구만 애꿎게 화살받이가 되어 친구들의 욕을 한참 동안 얻어먹어야 했다.
끝까지 뭔가 최선을 다해 마무릴 하고 싶었다.
경찰에게 부탁하여 영근이의 친형에게 면회를 갔었다.
어떤 작은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있고 금방 나갈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영근이의 소식을 알리고 유리벽 사이로 서로 살짝 눈물지었다.
나오는 길
영 기분이 복잡했다.
초면인 나에게 영치금을 넣어달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얼마 되지 않는 영치금을 넣어드리긴 했지만
그 묘한 기분은 아직도 어떤 암흑의 아우라처럼 떨쳐내기가 힘들다.
결국은 돈이었다.
이복 누나도 친형도 결국은 여력이 없어 그저 그를 포기했던 거였다.
영근이는 그렇게 스무 살 즈음 시간이 멈췄고
나는 그때 이후 병역특례를 받는 3년간 회사에 엄청난 손실을 끼치고 겨우겨우
기간을 채우고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1호선 석수역이었다.
석수역을 지나칠 때면
뭐라 설명할 길 없는 검은 나락과 같은 심연으로 빠져들곤 한다.
나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때 다시 회사에 소개를 해줬더라면 그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으로라도 뭔가 내용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이를테면 구체적인 죄책감이 명시된 문장으로의 표현 같은 거 말이다.
아직도 찾지 못했다.
앞으로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