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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함에 관하여

20200302 mon am 6:50

by 박종호

어제부터 와이프가 감기 증상을 보였다. 하필 이런 때에. 다행히 아주 전형적인 콧물 감기이다. 덕분에 집안에서 이런저런 눈치를 더 보게 되었다. 이럴 때 해야할 일을, 예를 들면 며칠 전만 해도 남편의 서비스라 여겨졌던 설거지 같은 일을 재깍재깍 하지 않으면 나중에 와이프에게 ‘몸이 아플 때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다‘라는 말을 어김없이 듣게된다. 그렇다면 아이들과 닌텐도 게임을 하며 ‘놀아 주고 있는’ 나에게는 억울한 일이 아니될 수 없다. 이것이 가사를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가부장적이고 마초적인 사고방식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i.


‘당신이 지금 무인도로 가야한다면 데리고 가고 싶은 사람 한 명과 가지고 가고 싶은 물건 세 개를 고르시오’ 한 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 유행한 적이 있다. 당신이 이 질문을 받는다면 제발 제발이지 그곳에 데려갈 사람으로 나를 꼽지는 말아주시라. 누구를 고르던 그 사람은 자기를 무인도로 끌고 간 당신을 평생의 원수로 삼을 테니. 그럼 세 개의 물건은? 나에게 묻는다면 태양광 발전기,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 그리고 ‘케스트어웨이’의 배구공 윌슨을 대신할 질리지 않을 얼굴을 가진 ‘어덜트돌’ 정도이지 않을까. 밥 먹는 걱정보다 재미가 우선이다.


나는 요즘 아주 심심하다. 심심하다는 것은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간다는 말과 같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몰이나 식당에 다니지 못하는 데 나는 워낙 집 안에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다 보니 가만히 앉아 있어도 스트레스가 먼지처럼 쌓인다.


지루한 시간을 빨리 가게 하는 데는 술을 마시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지만 두달 전 즈음 시작한 100일 금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탓에 아직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있다. (오늘이 58일 째이다.) 아주 오랜만에 장인과 만나 언제나 가는 그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온 밤이었다. 늦은 시간 자지 않고 기다리던 수빈이는 나를 보자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술을 그만 마시라고, 아빠가 술을 마시다가 쓰러지면 자기네는 어떻게 하냐고, 우리를 위해서 술을 끊으라고. 나는 순간 내가 그동안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나 하고 의아했지만 딸 아이가 울며 애원하는 데 내가 구지 술을 더 마셔야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애라 이게 뭐라고” 하는 마음에 다시 100일 금주를 시작했다. 아주 기막히게 이 날은 작년 100일간 금주를 마치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지 딱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술김에 100일짜리 금주를 다시 시작했지만 전날 밤 수빈이가 울면서 애원했던 일이 마음에 걸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에 와이프에게 전날 밤 일의 연유를 물었다. 아이들과 와이프가 열심히 보고 있는 ‘스카-레토’라는 NHK 아침드라마가 있는 데 주인공 키미코의 아버지가 극중에 병에 걸려 며칠 전부터 골골 거리더니 그날 아침 방영분에서 드디어 세상을 뜨셨단다. 아침 드라마의 내용에 충격을 받은 10살 딸이 때마침 그날 밤 술을 먹고 돌아온 아빠를 보고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수빈이는 그날 밤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 아빠는 왜 요즘 술을 안마셔?하고 묻는다. What?!


iii.


어제 와이프와 방학 기간의 생활표를 짜며 두 번의 산책 시간을 넣었다.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 아이들과 산책을 나가는 규칙이다. 하지만 어떤 규칙이든 가장 어기기 쉬운 시기는 그 규칙을 세우자 마자이다. 어제는 일요일이라는 핑계로 늦잠을 잔 탓에 아침 산책을 거르고 오후에 산책을 나섰다.


우리집 맨션의 단지를 나서면 넓은 고급주택단지가 나온다. 이 주택 단지 사이의 잘 가꾸어진 길을 지나면 무로미(室見)란 이름의 강을 따라 해변까지 이어지는 산책로가 보이는 데 이 산책로는 해변을 따라 후쿠오카 타워까지 그리고 후쿠오카 항까지 이어진다. 집을 나서서 이 산책로를 따라 후쿠오카 타워까지 간 후 그리고 다시 후쿠오카 도서관과 중앙공원을 거쳐 집에 오는 것이 우리집의 일상적인 산책 코스이다.


어제는 시간을 맞춘 것도 아닌데 후쿠오카 타워 근처에서 가족들과 산책 나온 수빈이 반 친구들을 셋이나 만났다. 모두들 주말에 어디 갈 곳이 없으니 답답하여 산책을 나온 모양이다. 어떤 아이들은 산책길에 구간을 정해 놓고 전력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미친듯이 달리는 구나. 보기만 해도 숨이 찼다. 정말 심심한 모양이다.


iv.


텔레비젼에 극한직업을 소개하는 프로가 있다. 매우 심심하니 떠오르는 극한직업이 있다.


매년 이맘 즈음 출장 때문으로 두바이를 들를 때마다 묵는 한인 민박집이 하나 있다. 이 민박집은 두바이에 관광이나 출장을 온 사람들 뿐 아니라 중동 각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가는 길에 두바이에 들러 몇 일씩 묵고 떠나는 장소이다. 사막이라는 배경과 맞물려 왠지 영화 ‘용문객잔’이 떠오르는 곳이다. 이 민박집에서 일년에 한 두 번씩 묵고 간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 사람을 ‘박씨’라 부르자)


박씨는 일년 중 절반을 바다 한가운데 시추선 위에서 지낸다. 그의 일은 시추 시설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일이다. 프로그램에 에러가 발생하면 이를 바로 수정하여야 한다. 수십억을 들여 제조한 시추선이 컴퓨터의 에러로 고장이 나거나 화재가 발생하면 안될 일이기에 이 사람의 역할은 지대하며 필수적이라 할 수 있지만, 초고가의 시설에 설치된 프로그램을 쉬이 에러가 나게 끔 엉성하게 만들어 놓았을 일이 없으니 박씨의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 법한 혹은 박씨에게는 아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그 일’을 기다리는 일이다.


그의 하루는 프로그램 점검으로 시작한다. 고장난 프로그램을 고치는 일은 아주 골치 아픈 일이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프로그램을 확인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업무라는 것은 단 몇 분, 몇 번의 엔터로 끝나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주 짧은 일상의 업무가 끝나면 그는 그 외의 모든 시간에 ‘대기’를 한다.


시추선의 업무는 휴일이 없다. 박씨를 쉬라고 시추를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니. 그는 6개월, 180일을 같은 풍경을 보며 같은 일을 하고 같은 하루를 산다. 박씨를 떠올리면 그가 바다 위에서 하루를 무엇을 하며 보내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그에게는 분명 지루함에 무너지지 않는 그만의 혹은 전임 선배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노하우가 있을 터이다. 나에겐 지금 그 메뉴얼이 절실하다. (박씨의 일과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오늘 후코오카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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