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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Oct 26. 2024

아기의 취향도 존중합니다

일일육아 10 / 출산 49일-55일

49일


거실 역류방지쿠션에 누워 잠든 아기를 확인하고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는 건조기에서 꺼내온 빨래가 한 보따리. 조그맣고 끝도 없는 아기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다가 아아 너무 졸려, 하고 옆에 있는 이불에 풀썩 쓰러진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흠칫 눈을 떴을 때 감각적으로 내가 길지 않은 시간 깜빡 잠이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20분가량이 지났으나 여전히 집은 고요했다. 얼른 마저 개고 나가야지 하며 습관적으로 켠 카메라 어플 화면 속에 하얀 방석이, 텅 비어있다. 있어야 할 곳에 아기가 보이 않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미친 여자처럼 뛰어나간 거실에서 나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아기는 역류방지쿠션 옆 바닥에 끼이듯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자다가 옆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곁에 비울 땐 잠시여도 늘 스트랩을 묶어두는데 실수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다행히 떨어진 곳이 두툼한 매트 위라 큰 문제없이 그대로 잠들어버린 모양이지만 만약 딱딱한 바닥이었다면? 쿠션이 아니라 침대였다면? 싶은 생각에 손이 덜덜 떨렸다. 아프진 않았어도 분명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을 텐데 어쩜 울지도 않았을까. 상태를 확인하려 아기를 들어 올리자 부스스 잠에서 깬 아기가 나를 보고 반가운 얼굴을 한다. 아, 눈물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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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일


쇼파를 한쪽으로 치우자 하얀 벽에 깨끗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전날 택배로 도착한 50일 촬영 세트를 펼쳐보았다. 레이스를 바닥에 깔고 아기의 왼편에는 꽃과 원목 장난감들을, 오른편에는 50일 기념 팻말을 세워두었다. 아기는 선물 받은 베이지색 바디수트를 입고 하얀 꽃관을 쓴 채 양털 의자에 앉았다. 인생 첫 의자라 앉기가 쉽지 않은지 자세가 애매하게 삐뚜름해졌지만 나는 신혼여행 이후로 처음 꺼낸 카메라를 찰칵찰칵 눌러대기 바빴고 남편은 내 뒤에서 딸랑이 두 개를 들고 춤을 추느라 정신없었다. 아기가 울기 전에 촬영을 끝내야 한다는 굳은 일념. 다행히 아기는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보느라 우는 법을 까먹었고 촬영은 수월하게 끝났다. 예쁜 표정을 건지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선방이다. 스튜디오 촬영에 비할바는 아니나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51일


아기가 첫 수유를 하고 2시간 낮잠, 두 번째 수유를 하고 또 2시간 낮잠을 잤다. 자그마치 4시간의 자유 시간이 생기니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집안일을 싹 끝내고도 시간이 남는다. 아, 컨디션 최상의 하루다. 아기가 낮잠을 너무 많이 자면 밤잠을 안 자는 것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겪어보니 사실은 정반대였다. 아기는 낮잠을 잘 자야 밤잠도 잘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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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일


아기 머리가 급작스레 꼬불꼬불해지고 있다. 직모 아빠와 반곱슬 엄마가 만났는데 어째서 왕꼬불머리 아기가 태어났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무지하게 귀엽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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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일


아기의 몸무게가 5.5kg을 넘어섬과 동시에 부부의 손목과 허리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허리디스크가 있는 남편은 저녁 7시, 아기의 목욕 시간만 되면 부리나케 허리벨트부터 동여매지만 매일매일 과부하가 걸리는 허리를 살려낼 방도가 없다. 두 개의 작은 대야로 머리를 감기고 목욕을 시키는 보편적인 방식이 너무도 버거워, 머리 감기는 일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해치우고 목욕은 식탁 위 큰 대야에서의 물로만 간단히 하는 걸로 조금의 힘겨움은 덜었지만 남편의 허리는 복구되지 않고 있다. 차라리 나를 시켜줘라! 내가 할게! 여러 번 말해보지만 너덜너덜한 내 손목을 보며 남편은 강경하게 고개를 젓는다. 고맙지만 아주 굉장히 걱정스럽다. 우리 집 가장 허리 살려. 아기는 이제 겨우 53일 차인데 오만 뼈대가 바스러질 앞으로의 수많은 나날을 어찌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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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일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 친척을 따라서 놀이동산에 간 적이 있어.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인형이 가득 있던 곳에 간 기억은 선명해. 작은 동물 인형부터 커다란 곰인형까지 갖가지 인형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어. 친척이 말했어. 갖고 싶은 거 하나 골라봐. 나는 별 고민 없이 한눈에 들어오는 형광 연두색 오리인형을 골랐어.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나는 비닐 재질의 인형이었어. 친척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어. 다시 생각해 봐 수연아, 다른 예쁜 것도 많잖아. 친척은 내가 고급스럽고 깜찍한 테디베어를 고르지 않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지만 나는 끝까지 오리 인형을 놓지 않고 말했어. 나는 얘가 이뻐. 얘가 맘에 들어. 친척은 결국 어린애들 취향인가, 하며 그 오리 인형을 사주었어. 애 낳고 나니까 문득 그때 생각이 나는 거 있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어린애의 취향이 아니라 그저 내 취향이었어. 나는 지금도 고급진 테디베어보다 형광 연두색 오리인형이 귀엽거든. 그러니까 우리 아이는 어려도 취향을 존중해 줄 거야. 우리 집의 원칙이야. 장난감이든 옷이든 신발이든, 적게 사주되 아이가 원하는 것을 사줄 거야. 부모의 취향 말고."


라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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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일


어제의 이야기가 무색하게 내 취향의 노랑 튤립 무늬 내복을 달랑달랑 사 왔다. 예쁘다. 금방 무너질 신념은 입 밖으로 뱉지 말고 혼자서만 생각해야겠다는 깨달음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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