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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Oct 23. 2024

가지 마요 이모님

일일육아 8 / 출산 39일-43일

39일


잠이 너무 부족하다. 24시간 몽롱한 상태가 사라지질 않는다. 너무 피곤하니 판단력이 흐려지고 실수가 잦고 사소한 일에도 자꾸 화가 난다. 산후우울증인가, 하다가도 이렇게 피곤하면 멀쩡한 인간도 화가 나는 게 지극히 정상이지 싶어 고개를 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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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산후도우미 이모의 마지막 출근일. 그동안 감사했다 인사를 하고 준비해 놓은 쿠키 선물 세트를 건넸다. 나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아기에게 건강히 잘 자라라 덕담을 하고 그렇게 이모는 마지막 퇴근을 했다.


이모가 떠난 집에 아기와 둘이 덩그러니 있는데 갑자기 세상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육아를 도와주던 유일한 제삼자가 영영 떠났다.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해주고 청소를 해주고 아기를 재워주고 씻겨주는 사람은 이제 없다. 이제 모든 것은 나와 남편, 단둘이 해결해야 한다. 아기는 해가 지자 여느 때처럼 한 시간을 내리 울어대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이 집에 오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성격은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방문은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오래 보고 신뢰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사람들이 산후도우미를 꼭 써야 한다고 말할 때도 걱정이 많았다. 별별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 들었고 오랜 시간을 같이 있는 것 좀 어색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기간을 지난 지금의 나는 예전의 지인들과 꼭 같은 말을 한다. 산후도우미는 필수다.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긴 시간을 쓰는 것이 좋다. 낯선 사람이 집에 있는 불편함은 홀로 아기를 돌봐야 하는 힘겨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산후도우미가 끝난 기간에 맞추어 남편이 출산 휴가를 일주일가량 사용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완전히 우울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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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일


아기 침대를 사러 집 앞 매장에 갔다. 아기 가구를 사러 직접 매장에 온 게 처음이라 마음이 들떴다. 직접 본 침대는 마음에 쏙 들었고 여러 가지 할인을 받아 기분 좋아 구매할 수 있다. 배송까지는 6주가량이 소요된다고 했다. 친절한 직원은 아기를 눕혀보도 좋다고 했지만 우리는 아직 50일도 안된 아기를 품에서 떼어낼 엄두가 안 났다. 눕혀보지 않아도 괜찮다. 아기는 분명 좋아할 것이다. 우리 침대보다 정확히 1.5배 비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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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일


'백일쯤부터 시작될 거예요.' 단골 미용실의 디자이너가 말했다. 출산 후 첫 방문이었다. '이렇게 숱이 많은 분들도 결국은 다 반토막이 나서 오시더라고요. 산후탈모 피해 간 분은 정말 한분도 못 봤어요.' 두렵다. 안 그래도 푸석해진 얼굴에 꾸미지 않아 더더욱 못나진 외모로 서글픈 날들인데, 더욱 못난 행색이 될 거라는 경고까지 들으니 눈물이 핑 돈다. 어떻게 뭐라도 하고픈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곧장 탈모 샴푸를 주문했다. 못생겨지고 싶지 않아. 돌아갈 거야. 예뻐질 거야. 주문을 외우며 클릭. 상품이 결제되었습니다. 모근 강화, 두피 활력, 모발 감소 개선. 실낱같은 희망의 단어들은 평소에 쓰던 샴푸보다 서너 배가 비싼 샴푸의 주문 버튼을 누르게 했다. 질끈 동여 묶은 머리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벽에 걸린 웨딩 사진 속에는 예쁜 신부가 머리에 꽃을 주렁주렁 달고 미소 짓고 있다. 화려한 전성기가 끝난 후 뒷방에 들어앉아 글을 쓰는 인간이 된듯한 기분이다. 탈모 하나로 이렇게까지 서글퍼질 일인가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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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일


남편이 혼자 나가서 잠시 바람을 쐬고 오라고 했다. 다음 수유까지 1시간 반가량 여유가 있었다. 옷을 대충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도보 15분 쇼핑몰 안에 있는 빵집에 갔다. 좋아하는 야채 고로케와 블루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고로케가 아주 따끈따끈했다. 아, 행복하다 생각하는 동시에 코 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 이 세상에 속해있는 사람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딘가에 홀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의 인생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지금 - 여기에 - 살아 숨 쉬는 사람이구나. 그러다가 눈물을 슥 닦고 어이없이 웃었다. 고로케 하나로 세상만사 이게 무슨일이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편에게 줄 간단한 간식을 샀다. 잠깐이라도 스스로를 환기하고 돌아오면 아기도 더 예뻐 보일 거라는 남편의 말이 맞았다. 역시 인생은 스스로를 잘 다루는 사람이 더 수월하게 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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