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지 않게 하는 책이었다가, 결국 말하게 하고 싶어지는
유나이티드, 스탠드업 - 침묵
이 챕터를 읽으며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피로감’이다.
소수자들은 언제나 호소하는 자들이고, 아픔을 내보이는 위치에 있으며, ‘나는 이렇지 않다’를 설명하느라 내가 누구인지는 정작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를 동등한 개인으로 인정해 달라. 우리에게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 우리에게 제도적 차별을 하지 말아 달라.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외침들.. 하지만 곧 목소리는 사라지고 성난 반발의 목소리가 뒤따라오며 그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그 실랑이를 벌이며 ‘내가 정말 잘못된 걸까?’라고 목소리를 주저하는 동안 그냥 ‘나’로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자들의 목소리 뒤에 가려진다. 그러느니 침묵은 편하다. 집에서 여자들만 좋아하는 이상한 음식인 ‘마라탕’ 혹은 ‘엽떡’ 하나 때리고 디비자면 되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위해 이 책을 읽었지만 오히려 이 책을 읽을수록 글을 쓰고 싶지 않아 졌다. 이 세상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어 진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개인의 일로 치부하고 싶다. 마침 나는 규범 사회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더욱 모른 체 하고 싶어 진다. ‘당신의 몸이 위대한 한 편의 시’가 될 거라는 휘트먼의 시 뒤에 숨어 운동이나 열심히 하고 싶었다. 실제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사람들에 공유했다. 그러나 이내 알았다. 우리는 ‘당신의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운동 계정에는 자신을 때려달라고 했다가 곧 ‘운동 좀 했다고 남자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건방진 년’으로 호칭을 바꾸는 남성들의 메시지로 채워진다. 우리는 곧 괴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시발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예술가의 초상 - 이 고통이 가치 있기를 바란다면
이 책을 통해 <딕테>를 처음 알았다. 너무 놀라서 당장 읽어야지 했으나 절판본을 30만 원에 팔고 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인터넷 창을 닫았다. 주위에 딕테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지 못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구성과 이야기는 너무 놀라웠다. 그런데 이런 책을 써낸 사람이 있다고? 한국여자라고? 그런데.. 강간살해를 당했다고?에서 ‘그래서’ 강간살해를 당한게 아니라고? 마치 백인남성이 하지 못한 성취를 해내서 그런 처벌을 받은 것처럼 허무하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그의 고통이 가치있기를 바라고, 삶의 마지막까지 몸부림쳤다. 그 사실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것이다.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딕테와 마이너필링스는 모두 새로운 언어이다. 우리가 쓸 말과, 이 괴성과 저 괴성이 뭐가 다른지 알려주고 발음해보라고 한다. 차의 서투른 영어처럼 우리는 말할것이다. 그리고 이내 고통을 똑똑히 말할것이다.
빚진자 - 소수자의 자본주의적인 승리는 얼마나 달콤할까?
이 부분을 읽고 내가 자본주의를 얼마나 좋게 보고 있었는지 다시 실감했다. 자본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우리를 차별하면 우리는 너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너를 소외시키겠다. 실제로 자본을 많이 가진 성별과 집단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응징을 하고 우월해지면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와본적이 없어서. 그래서 대신 더 소수자를 억압하는 방법으로 흘러가고는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가지가 더 있다. 여자들은 그런 마음때문에 주류가 될 기회를 놓친다고.
백인 순수의 종말, 서투른 영어 - 인종과 지역, 소속감
이 강의의 강사님이신 김현진 작가님은 이 비백인 여성을 한국여성으로 바꾸면 완벽하게 말이 된다고 했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감히 반대해보겠습니다. 인종은 이 책의 정말 큰 맥락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 맥락을 중요하게 여겨야한다.
나는 여성이지만, 한국에서 다른 인종인 여성이 겪는 일은 절대 겪지 않는다. 오래전 만화책방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다. 내 맞은편 의자에는 두 사람이 앉아있는데, 만화를 읽으면서 킬킬거리던 나이든 남자와 바닥만 보고 있는 너무나 어린 여자. 그 여자는 책을 읽지 않았다. 만화는 그림이 대부분이기에 아무거나 호기심에 꺼내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 꼼짝않고 그는 땅만보았다. 그도 한국여성일것이다. 하지만 나와는 같지 않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여성’으로 인정받는데도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동남아 여자’라는 여자로 대부분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산에서 왔다는 것, 사투리가 내 정체성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위축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시발 아니? 굉장히 권력이었다. 내가 아는 서울 친구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 한 명 이상이 꼭 있었다. 내 말투는 친근감과 정겨움을 유발하는 것이고, 내 개성을 한층 더 빛나게 해 주었다. 그것을 몰랐던 시절에는 그런 상황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웃음을 주려고 했지만 이내 알았다. 주류임을 재확인하는 말이라는 걸. 내 말을 납득할 수 없다면 한국사회가 해당 지역인 것 만으로 조롱과 불이익을 주는 곳을 떠올리면 된다.
우리는 성별만큼이나 인종과 지역의 소수성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가까이하기’로 담아내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다면 그때 우리 안에 많은 모순들이 설명된다.
막 대학생이 되었던 2009년, 미국에서 백인 남성과 결혼해 막 이민을 떠난 엄마는 전화로 나에게 말했다.
‘오바마가 대통령 됐다고 깜둥이들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우리의 목소리는 반드시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