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울 미, 풀 초 윤미초. 그것이 내가 세상에 들어서 처음 부여받은 것이었다. 부모님이 어느 날 사라졌단 것도, 그래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야 한다는 것도 모두 미초라는 내 이름보다 뒤늦게 주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 좋았다.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슬프지 않은 것이니까. 어느 날 자식과 사위를 함께 잃어버린 할머니는 똑같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를 품에 끼고 놓지 않았다. 당신의 사랑은 따뜻했지만 어딘가 한편은 구멍이 난 것처럼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사진으로만 봤을 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는 사라지기 전까지 풀을 정말 좋아했다고 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을 가장 사랑하게 될 너에게도 알려줄게.
할머니가 모아둔 엄마의 물건들 틈에서 찾아낸 육아일기 한 귀퉁이에 적혀있던 것. 내 이름의 유래는 여기서 왔구나.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도 풀, 자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엄마의 다짐은 결국 이루어졌다. 나도 엄마가 사랑하던 것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엄마가 이걸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말을 내게 해줄까? 모두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들이었다.
자라면서 점점 엄마의 얼굴을 하고 산과 들을 쏘다니는 나를 보는 할머니는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가, 어딘가 단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내게 할머니는 말없이 팸플릿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바닥에 놓인 팸플릿을 눈으로 슬쩍 읽어냈다. 집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였다. 나는 설명을 요하는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고등학교는 여기로 가라.” 할머니는 덤덤하게 말했다. 여긴 집 근처에 있는 ‘예술’ 고등학교였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난 예술에 관심이 없다. 예술적인 무언가가 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말없이 팸플릿만 만지작거렸다. 이건 일종의 싫다는 신호였다. 할머니는 이런 내 반응을 읽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여기가 집이랑 제일 가깝다. 고민하고 결정한 거야.”
어떤 걸 고민하고, 결정한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나를 지척에 데려다 놓아 당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결정한 모양이지. 그래도 예술고등학교라니... 그렇지만 난 할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당신의 아픔은 당신의 자식을 쏙 빼닮은 내가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니까. 이것 또한 내 이름보다 뒤늦게 주어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런 시골에 있는 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적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지만 나에게 없는 예술적 소양을 끌어내는 데에는 애를 먹었다. 겨우 연극영화과로 결정하고 원서를 내밀었다. 그렇게 별다른 노력 없이 고등학생이 되었다. 학교에 가는 시간과 집으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이전보다 줄었다. 할머니는 만족할까. 몇 없던 친구들은 모두 일반계 고등학교로 진학해 버렸고, 다들 신나는 얼굴로 교정을 누비는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는 나는 혼자가 되길 선택했다. 새 학기가 되고 친구들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니, 배우니, 감독이니 하며 내 취향을 물어왔다. 맨날 풀 아니면 꽃을 쫓아다니는 내가 뭘 알겠는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나를 기다려주는 친구는 없었다.
그나마 이 학교에 만족스러운 것이 있다면 교정이 끝내준다는 거였다. 틈만 나면 나는 교실에서 사라져 교내 곳곳을 누볐다. 그렇게 내 친구들은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또래들이 아니라 학교를 관리하는 나이 지긋한 분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학교에 마음 둘 곳이 생기니 더 이상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버티고 이제 올해만 잘 보내면 졸업을 할 수 있다. 대학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번 학기 제작 실습만 잘 마무리하면 성적은 어느 정도 맞출 수... 실습? 오늘이 며칠이더라? 나는 헉하며 눈을 떴다. 학교 양호실이었다.
꿈을 꾸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본 적이 있는가? 나는 종종 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겪기도 하는데 이 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무슨 꿈을 그렇게 생생하게 꿨는지 일어나 씻고 출근할 때까지도 내용이 기억에 계속 남아있었다. 그래서 얼른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이 눈감고 쓴 소설의 다음 편이 올라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일단 안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여기에 풀어놓았다. 그래서 아직 제목도 없다.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나도 모르기 때문에... 껄껄